‘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배만 드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기도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며, 찬양만 해서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리는 게 아니라 다른 소리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계심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참으심과 기다리심, 그리고 때때로 가만히 계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다. 문제가 사라졌다고 회복된 것은 아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려고 하는 시도는 계속된다. 주인공 옆에 언제나 악역이 당연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있다. 서서히 물들어 가며 똑같은 모습이 되든, 아니면 하나씩 이겨나가든 빛나는 주인공이 되든 그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 그동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주인 되신 하나님을 예의 있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이다.
박상현 – 믿음아 안녕?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의 삶 전체가 예배여야 합니다. 그런데 삶의 예배는 공예배에서 출발하고, 또한 공예배로 향합니다. 하나님이 복되고 거룩하게 하신 안식의 날 주일에,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자의 인도와 섬김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그분의 모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자리가 바로 공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공예배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공적이고 언약적인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그 만남은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대화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공예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공예배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분의 백성들이 응답하는 요소와 순서로 구성됩니다. 그 안에 주제와 논리와 흐름이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아는 것만큼이나 예배의 방법과 그 의미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느냐가 유일하시고 참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기도 가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정중현 & 신상훈 – 초청에서 강복 선언까지
우리는 자신이 머무는 장소에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내면과 외면의 새로운 경계를 열 수 있다. 달리 말해 거듭되고 결코 멈추지 않는 전환과 변화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내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지금의 나보다 아주 오래전 나의 일부로 돌아가는 일이며, 당연히 이는 켈트 유산이 지닌 힘이다. 내가 땅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땅과 내가 함께 관계를 맺는다는 상호작용의 의미이지 않을까? 나는 대지를 경건히 대하고, 또한 대지는 나를 키운다. 켈트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나와 대지의 관계를 잊지 않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 켈트 전통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알려 주었다. 깊이와 보편성을 지닌 본질적인 이미지들은 그리스도교를 풍요롭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소비주의 세계에서 텔레비전과 광고 속 피상적으로 연속되는 이미지들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런 이미지들의 진정한 의미를 숙고할 시간도 없이 말이다. 이에 불, 바람, 빵, 물, 빛과 어둠, 마음의 근본 이미지를 회복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에스더 드발 – 켈트 기도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