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에큐메니칼 진영이 보여주는 복음화와 연관된 강조점 경향
1. 전도보다 공존을 강조하는 경향
협의회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런 점에서 모두가 서로 정의롭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공존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이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수용하라고 하는 행위 즉 전도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협의회는 전도보다는 공존과 포용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는 좋은 소식은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가 실현된다는 약속과 관련된다. 포용성은 인류와 창조세계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창조세계가 상호 인정하고, 또한 각자의 성스러운 가치에 대해 상호존중하고 가치를 지탱하는 정의로운 관계를 양육시킨다.”라고 말한다.
위의 주장에 의하면, 협의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는 좋은 소식’ 즉 전도는 포용적인 세계를 실현하는 일과 관련이 된다고 말하면서, 각자가 지닌 성스러운 가치를 상호존중하고 지탱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다. 즉 협의회는 모두의 공존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기에 다름을 포용할 것을 강조하고 이 포용의 범위에 다른 종교도 은근슬쩍 포함되는 경향이 있다. 즉 협의회는 아주 분명하게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은연중에 그런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공존과 포용을 중시하면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로 이어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무조건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자세로 전도에 임하는 것을 지양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전도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협의회처럼 전도보다 공존을 강조하면서 다원주의적 성향을 갖게 될 때 자연히 전도는 약화되고 그 결과 교회가 심각하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원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더 큰 종교적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다원주의적인 자유주의가 전통적인 주류교파 신학대학들의 지성적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이들은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에 대하여 신학적 도덕적으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볼 때, 주류 자유주의 교파들에 두 가지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로,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 둘째로, 사회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이해와 다원주의 신학을 수용한 자유주의 주류 교파들의 경우 교인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는 확신과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선교정신이 자유주의 개신교 영역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결과 1940-1985년에 그 멤버 숫자가 감리교는 48%, 장로교는 49%, 감독교회는 38%, 그리고 회중교는 56%나 감소하였다.”
전도보다 공존을 강조하는 경향은 일정부분 교회의 전도 자세를 교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면이 없지 않지만, 위에서 이원규가 보고한 대로 선교의 급격한 쇠퇴와 교회의 심각한 약화를 가져오므로 협의회는 이런 점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선포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경향
전도와 연관하여 나타나는 협의회의 또 다른 경향은 선포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전하는 일이므로 그것은 일정부분 선포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전도를 하면서 구원의 내용을 상대에 따라서 타협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선교에서도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대화를 하면서 선교와 전도를 수행하였을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선교는 대화를 통하여 상대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상대와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상대에게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대화를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진영은 기본적인 관심 자체가 전도보다는 공존과 샬롬에 있으므로 전도보다는 공존에 무게를 두며, 공존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선포보다는 대화를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대화를 말할 때도 전도의 다리가 되는 채널로서의 대화보다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대화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런 점에서 협의회는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에 도달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지만, 전도가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대화의 목적이 전도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특별히 협의회가 말하는 대화의 목적은 전도가 아니라 더 넓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기독교 외의 타종교에도 일정부분 구원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나이로비 총회에서도 나타났는데, 나이로비는 “.... 하나님은 어떤 세대, 어떤 사회에서도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 하지 않은 채로 방치하지 않으셨다고 진정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 밖에서부터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종교다원주의적인 색채를 은근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협의회는 “....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곳에 어떻게 현존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이미 활동하고 계시는 곳이 어디인지 분별하기 위해서 복음은 더 넓은 맥락에 참여하고 대화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이 말에 의하면 이미 타종교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현존하고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므로 타종교인들 대할 때 복음을 선포하려하지 말고, 타종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고 더 깊고 넓은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성경에는 그 어디에도 타종교인과 함께 진리를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선포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경향은 상황적으로는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성경보다 상황을 따른 교회는 대부분 쇠퇴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선포보다 대화에 더 무게를 두는 협의회의 경향에는 우려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3. 전도의 범위 확장 및 상대화 경향
에큐메니칼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선교의 범위를 무한대로 넓히는 것이다. 선교를 말할 때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구령과 교회 세움을 핵심적인 사역으로 보았던 반면,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 개념은 세상을 잘 살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선교가 된다. 최근에는 창조질서보존(Integrity of Creation) 까지 선교의 범위에 포함하므로,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 그리고 동물을 잘 보호하는 것도 선교에 포함되게 된다. 선교의 범위를 지나치게 무한대로 확장하면서 모든 것을 선교에 포함하는 행태를 보고 스티븐 닐은 “모든 것이 선교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 라는 말로 지나치게 포괄적인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우리 속담에도 “열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밥 굶는다” 라는 말이 있듯이 교회가 선교라는 개념 속에 모든 것을 다 포함하다보면 전문성이 떨어지고 결국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선교사역 즉 복음 전도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확장 경향은 전도에도 나타난다. ‘전도’ 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 그런데 협의회는 ‘전도’라는 용어를 쓰면서 그 용어 속에 엄청나게 많은 사역을 포함시킨다. 물론 협의회가 전통적인 의미의 전도를 부인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칼 브라텐이 “.... 공식적인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고전적 의미 안에서의 전도에 대하여 립서비스를 한다. 즉 [에큐메니칼 진영은] 전도를 거부할 정도로 비외교적이지는 않다.”라고 말한 후, “그러나 시간, 돈, 인력들을 전통적인 복음전도를 대체하는 일들 즉 가난, 인종 차별, 부정의, 억압 등을 해결하는 일에 쓰고, 가장 안 좋은 것은 선포를 대화로 대체하는 것이다.” 라고 평가할 정도로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브라텐이 분석한대로 에큐메니칼 진영은 전도라는 용어를 립서비스로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가난, 인종 차별, 부정의, 억압 등을 해결하는 일도 전도에 포함시키면서 그 폭을 확대시킨다. 예를 들면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는 “전도는 자기 비움의 겸손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또한 다른 문화들과 신앙들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또한 전도는 이러한 지형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가치들에 모순되는 억압과 비인간화와의 구조들과 문화들에 맞서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활동이기 보다는 의식화나 정치 활동에 가까운 활동으로 보인다. 타종교와는 대화를 하고,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투쟁을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전도라고 한다. 이것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전도의 개념과 같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념의 무한 확장은 자연스럽게 선교에 있어서 핵심 사항인 전도를 여러 사역 중 하나로 상대화시켜 버리는 문제를 낳게 된다. 이것은 자연히 전도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므로 우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계속)
#안승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