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기술 발전의 양면성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신학적·윤리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인류는 현재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문명 변곡점의 서막, 미지의 영역에 서 있음이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기술의 획기적 진보는 우리를 새로운 윤리의 경계로 몰아세우는데, 생명공학에서 인공지능(AI)까지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상상을 초월한 혁신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질문에 직면케 한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다면 과연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AI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이 요구되는 것은, 인간은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아바타가 결코 아닌 “하나님의 형상”(창 1:27)이므로 인간 본성을 찾아 갈고 닦는 일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기술 발전이 공공선(公共善)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술 윤리가 절실히 요청된다.
21세기에 실존하는 우리는 갈수록 강력해지고 편리해지는 문명의 이기(利器)와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 시대에는 인지, 이해, 판단, 창작 등 다양한 인간의 지적 기능까지 수행하는 AI가 등장했으며, 우리는 탁월하고 효율성 높은 AI의 결과물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인간이 개발한 도구가 인간의 지적 지능 수준을 넘볼 정도로 똑똑해졌지만, 그를 사용하는 인간은 자신의 지적 결함을 보완하고 인지적 수고를 덜어내기 위해 고안된 디지털 기술에 압도당할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가장 강력하고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지적 기능을 대체할 수도 있는 똑똑하고 효율성 높은 기술에 휘둘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24시간 무한 기계학습을 하는 AI와 달리 거의 진화하지 않는데, 성장기 때 교육과 학습을 통해 형성한 사고방식과 인지구조를 변화한 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기를 꺼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이 시대에도 신기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러다이트(Neo-Luddite)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엘륄(J. Ellul)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현상을 ‘기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사람들은 정치 혹은 경제가 시대를 이끌어 갈 거라면서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엘륄은 기술이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단하였다. 그는 기술 발달의 양면적 명암을 예측한 예언자이기도 한데, 특별히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기술과 신학의 경계에서 이를 융합하여 신학적·윤리적 토대를 견고히 구축할 인물이 절실히 요청된다. 많은 사람이 근시안적 안목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 속에서 총체적 관점으로 전체 인류와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세심하게 살피는 거시적 혜안(慧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중요한 관건은 기술이 이용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적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일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무한한 번영의 가능성 이면에는 방향만 다를 뿐인 파국의 가능성 역시 잠재하기 마련이다.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기술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갖지만, 뒤따르는 부작용은 인간 사회를 난황에 빠트리기도 한다. 신기술에 대한 인류의 오용과 악용, 남용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리 예측하기도 힘들며 앞서 모두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기술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인류는 희망과 우려, 기대와 후회의 과정을 반복해왔는데, 현 시점에서는 양날의 칼인 AI라는 신기술을 맞이해 다시금 이 반복 과정에 진입하였다.
그런데 위중한 사안은 AI 신기술이 세상 전체를 바꿔버리는 대전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대전환을 일으키는 혁신 신기술이라는 점이다. AI는 누구나 개인적으로 쉽게 다루고 예견되는 역기능에 바로 대처할 수 있는 만만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AI가 확산할수록 걱정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 AI 기술이 기존의 다른 기술과 다른 점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초지능’으로의 자발적 발전 본능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런 AI에게 인류의 기존 가치관과 윤리를 학습시키는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AI는 초지능을 정점으로 하여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거라고 닉 보스트롬은 경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해소할만한 적절한 대안이 좀처럼 체감되지 않기 때문에, 무지는 막연한 공포를 증폭시키고 심란한 상황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AI가 열어줄 미래에 대한 올바른 방향 제시와 더불어 구체적 준비도 뒤따라야 한다. 비가역적 대전환이 따라오기에 발생 가능한 문제 상황에 대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기술이 획기적으로 진보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른바 ‘기술 신학’이 구축되어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4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불가피 여러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미리 고민하면서 도덕적·윤리적, 사상적·정신적 토대를 마련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화를 못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 발전이 인간에게 편의와 유익을 준다고 가정하지만, 그만큼 폐해와 부작용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기술 발전의 양면성을 통찰하는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 발전을 뒷받침할만한 기술 신학의 필요성이 대두됨은 물론, 이에 대한 도덕적 윤리와 인문학적 성찰 또한 요청된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술이 절대자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전지전능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미리 정해놓고 인간에게 이로운 기술이 되도록 도덕적·윤리적, 사상적·정신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과학 기술의 방향성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AI 담론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이 뇌와 영혼 없는 괴물이 되어서 인간을 지배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 신학을 정립해야 할 당위성은 임박한 AI 혁명을 예고한 챗GPT가 출시되면서 더욱 부각된다. 최근 챗GPT를 사용해본 사람들의 사례가 무수히 공유되면서 경탄과 불안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챗GPT는 사실상 인류가 축적한 거의 모든 지식을 암기하여 깔끔한 논리와 문장의 형태로 매우 신속한 답변을 내놓는다. 많은 사람이 챗GPT에 열광하는 이유는 재밌고 신기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마다 영화 속의 ‘아이언맨’(Iron Man)이 아니어도 AI 비서 ‘자비스’(Sabis)를 가질 수 있다는 로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챗GPT가 지닌 문제점 내지 한계 역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챗GPT는 유려한 답변을 재빠르게 제공하지만, ‘환각 현상’(챗GPT의 ‘환각’이란 오류가 있는 데이터를 학습해 잘못된 답변을 정답처럼 제시하는 현상)을 대표적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이로 인한 정보의 부정확성, 잘못된 편견의 확대재생산, 출처 불분명한 자료의 짜깁기식 표절 등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계속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나와 오류율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사람들은 사사건건 챗GPT에게 물어볼 것이고, 마침내 AI가 지식의 판정자가 되는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AI가 지식의 판정자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현실인데, 판정은 미래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지적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성형 AI는 정보 추출에서 편향성과 함께 인지 빈곤(cognitive poverty) 문제도 야기한다. 일례로 우리가 유튜브에서 검색보다는 알고리즘(algorithm, 어떤 주어진 문제를 풀기 위한 절차나 방법)의 추천을 통해 무의식적인 시청을 하고 이를 통해 편향된 관심과 취향을 강화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듯이, 챗GPT의 생성형 대화방식은 개인의 정보 편향 문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가 있음에도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된 선택을 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알고리즘의 늪에 빠져 공정한 관점을 잃을 수도 있다. 이에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함양하지 않으면, 편견을 더욱 증폭시키고 AI에 끌려다닐 수도 있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온 정보 접속 환경이나 미디어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두뇌 유출’로서 ‘뇌의 인지능력이 줄줄 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술의 발전과 인지능력의 퇴화가 상관관계에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정당하다. 특히 챗GPT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실로 포장해 결과물을 출력하는 기술이라는 점은, 사용자인 인간이 정보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사실 검증자의 역할과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검증 능력이 챗GPT 이용 시 핵심 역량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기존의 교육방식, 평가와 보상 체계, 업무 처리, 창작 관행 등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뿐 아니라, 다방면으로 근본적 차원의 재설계와 구조 개편을 요구한다. 생성형 AI가 던지는 핵심적 과제는, 개인과 사회의 기술 따라잡기 차원에서의 수용과 학습 차원을 넘어선다. 거대한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 무기를 누구나 지니게 된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무기 사용법을 능숙히 익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챗GPT처럼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춘 AI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AI의 속성과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각종 사기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커지게 된다. 개인적 차원의 활용 교육과 책임 의식 고취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위험 대비책과 규제 방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AI 기술이 가져온 거대한 변화와 그 영향력을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필수적인 시민 역량으로 간주하고 교육하는 일이다. 이른바 ‘AI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한데, 특히 AI에 대한 비판적 사고능력을 가르치는 게 요구된다. 이로써 우리가 기술 발전에서 얻을 수 있는 수혜와 혜택은 누리는 한편, 위험과 부작용은 피할 수 있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챗GPT가 교육의 지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이 시대가 이토록 갑작스럽고 빠르게 도래한 사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나 기독교 교육 사역자들에게 챗GPT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이슈를 던지고 있다.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챗GPT의 출현으로 인해 목회자와 교사들은 여태껏 해온 여러 사역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스마트폰을 사용하듯 챗GPT를 사용하는 다음세대에게 신앙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챗GPT는 개인에게 차별화·개별화된 맞춤 교육을 시행하고 교사가 여러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교회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거라는 기대감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챗GPT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잘못된 내용(특히 인터넷에 떠도는 이단 사설)이 뒤섞인 답변을 내놓는 점이나 교사들이 말씀 연구와 교육을 위해 챗GPT에 무분별하게 의존하는 점 등은 상당히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챗GPT에 대해 신학적으로 깊이 숙고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주도면밀하게 성찰함으로써, 교회와 성도가 챗GPT 열풍에 휩쓸리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한국 기독교가 챗GPT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전용 챗봇도 구상해볼 만하다. 물론 이러한 일을 각 지역 교회가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교단이나 교회 연합 차원으로 노력과 투자가 모아진다면 바른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AI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기독교 역사에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챗GPT로 신앙을 가르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한계와 문제점을 우려하지만,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동반자 인간 교사의 도움이 함께 병행한다면 챗GPT의 좋은 활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이는 곧 목회자들이 챗GPT의 한계와 잠재적 위험성을 인지하여 하나님과 성도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높은 도덕적 윤리의식, 매 순간 적절한 판단력을 지혜롭게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다. AI에 너무 의존해서 말씀 연구와 신학적 연구에 등한히 하거나 영적 지도자 역할을 망각한다면, 목회자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챗GPT 활용이 교회 사역과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공적 논의가 요청된다.
우리는 기술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 놓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선 안 된다. 이 땅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받은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동참하고 끊임없이 변화의 바람을 앞서 살펴야 한다. 사실상 인간이 하나님의 문화 위임을 수행함에 있어 도구와 기술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인류는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고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기술을 통해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고 마침내 기술 문명을 이룩하였다. 기술이 인간 삶의 일부가 된 기술 문명 시대에는 기술과의 대립 대신에 결국 기술과 공존하는 사회를 구상해야 한다. 다만 어떻게 하면 기술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신론적인 방식이 아닌, 지금보다 더 인간에 친화적이고 가치 중심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인류 공통의 가치와 목표인 공동선(共同善) 가운데 하나인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고민할 과제가 남아있다. 그러려면 앞서 언급했듯이 기술에 대한 신학적 이해력을 높이고 양면성을 내포한 기술이 지닌 장단점 사이의 가치를 신중하게 판단하는 신학적·윤리적 성찰이 절실히 요청된다. AI의 수용할 부분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복음 전도에 지혜롭게 활용하는 한편, 우려되는 부분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건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계속>
※ 상기 본문은 지난 11월 10일 서울영동교회에서 있었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회에서 곽혜원 박사(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가 전한 강연 전문입니다. 지면 관계상 일부 각주는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