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의 혜암신학칼럼] 증오와 보복의 살육전쟁에서 황금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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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신학아카데미 자문위원)

2차대전 이후 2023년까지(1945-2023) 세계는 증오와 보복의 전쟁

김경재 박사

지구촌이 전쟁의 울부짖음으로 신음하고 있다. 2차대전의 참혹한 현실을 경험한 지구촌 인류들은, 지구 역사상 최초로 UN 기구를 조직하여(1945) 새로운 문명시대가 열릴 것을 기대했다. 평화사상가 함석헌도 당시 UN 창립에 매우 고무적이었고 큰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곧바로 미국-소련을 양극으로하는 냉전시대가 시작되고 지구촌에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파키스탄 전쟁, 악명높은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민간인 집단 살육, 레바논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증오와 보복과 살육의 적개심이 난무하였다. 종파주의, 인종주의, 케케묵은 민족주의나 시대착오적인 이념주의는 귀중한 사람의 생명을 전쟁 수행의 한갓 도구나 수단으로 치부하였고 인간 생명 2,000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늘 바라보기가 부끄럽고, 지구생태계 다른 생물체들을 대하기엔 인간종은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피할 길이 없다.

인간이란 그렇게 어리석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고르바초프의 선언으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1991) 등소평이 나타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 일부를 중국사회에 받아들이기로 선언한(1981) 이후, 현실적으로 지구촌에는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도 없고 순수한 공산주의 국가도 없어졌다. 관념적 정치이념을 정권 통치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이비 정치독재자들이 국민을 기만하고 통제하고 길들이는 권력 강화 수단으로 이념전쟁을 강조한다.

냉전시대 이후 새로 등장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유럽 강대국들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 야망은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무기경쟁과 방산사업이 인간살육의 전쟁 현실에서 호황을 누리는 국가나 기업가들도 많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 전쟁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UN 정치는 실종되고 인간 죄성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 평화를 원하는 많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이 발생한 지 두 달 만에 사망자는 10,000명을 훨씬 넘어섰다. 우리는 절망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고 손 놓고 인류가 멸망하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폭력은 폭력을 낳고, 분노와 증오심은 영혼에 치명적인 독소

세계적 보편종교를 대표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인간 심성론에서 공통적인 점 한가지는 상대방 인간을 미워하고, 무시하고, 화내고, 증오하는 것은 인간 심성을 파괴하는 치명적 독임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관용과 용서를 가르친 예수님만 생각하면 기독교 윤리성은 한나 아렌트가 핵심을 집어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로 쉽사리 휩쓸리게 된다. ‘평범성’이라는 우리말로 번역된 ‘바이나리티’(banality)라는 어휘의 깊은 의미는 단순히 비범하지 않고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다. 너무 흔해 빠진 행동이나 관습적 언행으로 인하여 그러한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거나 언급하기에는 너무 진부한 것이 되어버린 윤리 의식의 마비 상태를 의미한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책으로 유대인 증오하는 것을 교육받고 반유대주의에 익숙해진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범죄행위를 집행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아무런 양심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평범하고 진부하고 흔해 빠진 일상사요, 관료로서는 상관 명령에 복종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독일 고위 장교였고,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독일 엘리트 가장이었던 것이다.

마태복음서 기록에 의하면(마5:19-20),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 ‘바보’라고 욕하고 무시하는 언행, 흔히 언쟁에서 우리도 모르게 쉽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상대방 인격을 폄훼하는 ‘미련한 놈’이라는 욕설 자체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인격살인 행위라고 엄정하게 가르치셨다. 놀라운 가르침이다. 가정, 직장, 심지어 교회 안에서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사람들이 맘에 큰 상처 받고 고통받는 대부분 원인이 상대방 인격에 대하여 생각 없이 던지는 인격모독의 말, 화내는 행위, 인간 존엄성을 건드리는 언행 때문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3가지 치명적 죄는 “불신앙, 탐욕, 교만”으로 보지만, 불교에서는 “탐욕, 화냄, 어리석음”(貪瞋痴)를 3독(三毒)이라하여 엄하게 경고한다. 특히 진(瞋)은 화냄, 분노, 눈알을 부라리는 증오심을 의미하는데 ‘화내는 것’을 3독심의 하나로 지적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각지의 전쟁터에서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핵심 문제는, 감정조절 능력과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감정이입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점점 더 증오심과 적개심을 증폭시키는 ‘분노의 세기’가 되어 있다는 현실이다.

정치현실주의란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종은 그 본성 자체가 이기성, 공격성, 지배욕, 무한 탐욕성을 가진 고등동물이라고 본다. 그러한 부정적 심성은 집단적이 될 때 더욱 강렬해지고, 미국영화 서부 개척사에서 보는 악당들처럼 통제불능 상태가 되기 때문에, ‘소박한 평화주의’는 해결책이 아니고 오로지 악당들의 폭행을 저지할 ‘압도적인 힘의 우위성’을 가지고 인간집단의 동물성과 야수성을 통제, 관리, 억압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정치적 현실주의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성’ 확보는 결국 경찰력과 군사력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에, 정치현실주의는 언제나 ‘군사주의와 부국강병주의와 국가폭력의 정당화’를 금과옥조로 삼게 된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정치현실주의자들과 군사주의자들의 주장 속에, 현실을 현실로 보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증폭시키며, ‘힘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예방한다’는 원리는 쉽게 무너지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역사적 사실도 현실이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팔레스타인 하마스 무장집단과 이스라엘 방위군, 그들의 주장과 무력 행동 속에만 ‘진실과 정의’가 있다고 서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엄한 인간생명 살육을 저지르고 죽으면서도 “알라는 (하느님은) 위대하다!”라고 소리치거나 “야훼 하나님의 정의심판이다”라고 확신하는 기막힌 역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황금률(黃金律)만이 유일한 살길, 집단생명체의 지속 가능한 불변원리

예수께서 모세율법과 예언자들 가르침의 결정체가 황금률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왜 황금률이라고 하는가? 금처럼 귀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한 공동체 인간 생활의 기본원리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황금률은 인류 4대 종교가 모두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황금률을 지키지 않으면 어찌되는가? 물리학의 역학법칙을 무시하고 철근을 눈 속여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세운 교량이나 아파트는 붕괴되고 말듯이 어떤 인간 공동체도 무너지고 만다. 멸망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물리 세계 안에 엄정한 물리법칙과 역학법칙이 있듯이, 인간의 정신적 생활세계도 그런 절대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고, 정치이념을 초월하고, 종파나 인종이나 정당이나 국가를 초월하여 엄존하는 생명법칙이다.

인간은 누구나 친절한 말, 칭찬, 인정, 존중, 건강, 평등한 인간으로서 대우 받기 원한다. 내가, 우리가 그것을 원한다면 남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황금률은 지키려고 맘만 먹으면 실천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윤리다. 그러나, 가장 쉽고도 가까운 이 황금률이 현실 생활 속에서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꼰대가르침’이라고 업수이 여겨진 결과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의 여야정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한일 관계, 남북 관계, 본토민과 이주민 관계, 노사관계, 직장에서 갑을 관계 등 모든 문제에서 공존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황금률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고 생활화하는데 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정의로운 폭력이나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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