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지난 4일 오후 제418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했다. 이날 송재원 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섭외이사, 국가보훈부 연구원)의 사회로, △이재근 교수(광신대)가 ‘호남 첫 목사 최중진(崔重珍, 1871-1932)의 다면적 생애와 활동’ △한강희 교수(한신대)가 ‘미군정과 김재준; 조선신학교와 미군정 관계로 보는 기독 지식인의 군정 인식’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호남 첫 목사 최중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고찰
먼저, 이재근 교수는 “최중진(崔重珍, 1871-1932)은 김필수(金弼秀, 1872-1948), 윤식명(尹植明, 1871-1956)과 함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구역이었던 호남에서 배출한 첫 장로교 목사 3인 중 하나였다”며 “1904년부터 그는 김필수, 윤식명과 함께 남장로회 한국선교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09년 9월 6일에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회 독노회에서 신학교 졸업자 8명 중 하나, 호남 지역 출신으로서는 3인 중 하나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
이어 “세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개종하고, 선교사들의 추천을 받아 그들과 함께 조사로 활동했다”며 “목사가 된 후 세 사람이 걸은 행보는 서로 겹치는 지점이 별로 없을 정도로 아주 달랐다”고 했다.
이 교수는 “최중진의 육십 평생은 지극히 파란만장했다”며 “동학운동가에서 시작하여, 천주교회, 장로교회, 자유교회, 조합교회를 거친 종교 지도자로서, 조선노동공제회, 청년회, 형평사, 신간회, 조선일보를 거친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서, 그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한국 기독교인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변화무쌍했다”고 했다.
이어 “심지어 일제 강점기 종교계는 한국인, 일본인, 서양인(개신교 미국인, 천주교 프랑스인) 등이 대변하는 민족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등의 사상 및 정치적 배경이 뒤얽힌 복잡한 역사 무대였으므로, 그의 반복된 이동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역학 관계 또한 분석해야 한다”며 “그의 잦은 사회적 변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와중에 그는 사망할 때까지 결혼을 네 차례나 했다. 이런 생활 방식 역시 당대 일반적인 한국인, 특히 기독교인의 관습과는 달랐다”고 덧붙였다.
그는 “먼저, 그의 삶에 일관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일관성의 1차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의 내적 개인 기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최중진은 냉정한 학자형 목사이자 문필가였던 동기 김필수와 자주 비교됐다. 최중진은 열정적인 다혈질의 행동가였다. 끈기, 인내, 평온으로 묘사되는 김필수와는 달리, 최중진은 감정의 사람이었고, 관심을 보인 주제도 자주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중진의 감정에 충실한 다혈질적 기질만을 수많은 변곡점에서 그가 내린 많은 선택의 유일하게 일관된 동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외적 요인, 즉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요인도 분명이 있었다”고 했다.
이재근 교수는 “최중진이 참여한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의 교리와 강령이 외친 구원, 자유, 해방, 평등, 애국, 애민, 독립, 자립, 행복이라는 가치는 그 운동에 참여하는 자신을 그 운동의 대변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며 “이런 고조된 자아인식은 자부심, 공명심, 자존심을 형성했다”고 했다.
아울러 “부모의 보호를 떠나 성인이 된 모든 인간의 실존적 현실인 재정 상황도 여러 선택 과정에서 그가 내린 결정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라며 “특히 자유교회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요구사항의 핵심에 선교사의 빈약한 재정 지원 문제가 있음을 숨김 없이 보여주었다. 다른 많은 자유교회들와 마찬가지로, 그의 자유교회가 조합교회에 가입한 가장 분명한 이유가 돈 문제였다는 것도 당시에 그 사건을 평가한 당대 사람들의 평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 조선신학교, 미군정이 제공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신학교육 실현
이어 두 번째 발제를 맡은 한강희 교수는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은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육의 주체성과 세계적 수준의 신학 구현이라는 목표 가운데 조선신학교 창립과 운영에 관여해 왔다”며 “하지만 일제가 군국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신학교 통제정책을 강화함에 따라 신학교의 교육 이념이 구현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들어선 미군정 체제는 조선신학교 존립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고 했다.
한 교수는 “미군정은 종교적 자유와 교파의 자율성을 보장했고, 사립학교 고등교육을 확장하는 정책을 전개했다. 이는 조선신학교의 교육 이념 구현과 신학교 운영의 제도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김재준은 조선신학교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미군정으로부터 적산을 불하받아 교사를 확장했고, 미군정의 사립학교설립 확대 정책에 따라 조선신학교를 재정비하여 대학설립을 인가받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재준의 미군정에 대한 인식은 먼저, 일본 제국주의 체제와 반공주의와의 비교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둘째로 미군정의 친기독교적 성격을 간파하여 이를 조선신학교 재건에 활용했다”며 “마지막 셋째로 조선신학교의 제도화 과정은 미군정이 해당 기관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한 ‘특혜’라기보다는 미군정에 참여하여 기여했던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혜택’이었다”고 했다.
이어 “결국 김재준은 미군정 시기 조선신학교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가야 하는 시급한 책임 속에서 미군정과의 관계를 풀어나갔다”며 “김재준은 미군정 체제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현실적인 시각에서 국가 재건의 시기, 반공을 근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미군정이 진보적 신학과 교육을 고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아울러 “실제로, 미군정이 제공한 적산불하와 대학인가라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 조선신학교는 일제강점기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던 신학교육을 실현해 나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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