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가고 홀로 우물가에서 쉬고 계셨던 예수님은 물 길러 온 한 여인과 일대일 미팅을 하셨다. 요한은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다. 낯선 여인, 그것도 사마리아인과 대화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하고 계시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제자들이 돌아오자 여인은 우물 곁을 떠났고, 제자들이 구해온 음식을 잡수시라고 권했는데 예수께서는 드시지 않고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32절)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은 어떤 양식일까?
인류의 문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만남의 시작이 양식 문제였다. 생수로부터 예배까지, 중요한 대화로 발전했다. 결국 여인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믿는다며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의 해결자가 되실 것이라는 믿음을 보이자 예수님은 “내가 그라”는 충격적 선언을 하신다. 여인 입장에서는 엄청난 특권이지만 제자들에게도 속시원하게 밝히지 않던 말씀 아닌가? 여인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렇게 엄청난 특권을 누린 것은 뚜렷한 변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선교사가 어느 날 식인종을 만나 목숨을 걸고 도망쳤으나 막다른 코너에 몰려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단다. “하나님, 이 식인종이 기독교인으로 변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식인종이 갑자기 무릎을 꿇기에 “하나님을 아느냐” 했더니 “안다”고 해서 살았다 싶었는데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기도하더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인종의 변화는 거짓 변화였던 것이다.
여인은 떠나고, 예수님은 잡수시라고 음식을 드렸지만 마치 시장끼를 이미 다 해결하신 듯, 드시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셨다. 당연히 음식이 아니다. 그건 가슴을 채우는 기쁨과 희열, 영치인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이 한 영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영혼의 필요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빨리 먹고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제자들은 누군가 약삭빠르게 따로 움직인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다(33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서로가 다른 양식을 말하고 있다. 물론 제자들이 말하는 양식도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이게 떨어지면 단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고, 인간이 살아가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식욕은 인간의 본능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 양식을 통칭 밥이라 한다. ‘밥심’으로 사는 존재들, 먹기 위해 살고, 먹기 위해 일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의 아침 인사가 “진지 자셨나?”였다. 부모가 자녀에게 건네는 인사말도 “밥 먹었니?”, 그래서 ‘밥은 먹고 다니니?’ 이게 쏘울시스터의 타이틀 곡 제목이었고, 강호동은 이 제목으로 방송프로를 진행했다. 친한 친구와 전화할 때도 가장 흔히 하는 말이 “언제 밥 먹자”, 꼭 밥 먹자는 얘기가 아니고 한 번 만나자는 뜻이다.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를 썼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생명과 직결되기에 밥을 하늘에 비유했다. 하늘을 독차지할 수 없듯이 밥은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찬드라 구롱이라는 네팔 여인 기억하나? 외국인 근로자로 입국, 서울의 한 섬유공장에서 보조 미싱사로 일하던 네팔 노동자다. 그녀는 공장 근처 식당에서 라면을 시켜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지갑이 없었다. 안 들고 온 거였다. 식당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한국어를 더듬는다고, 헛소리한다고 '1종 행려병자'로 처리해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렇게 갇힌 세월이 6년 4개월, “네팔 사람이고, 미치지 않았다”고 열심히 어필했지만 강제 투약을 당했다. 라면 한 그릇 먹은 것 때문에 6년 4개월 동안 정신병동에서 사육당한 것이다. 그녀의 이 기막힌 고난 이야기가 『말해요 찬드라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기록』으로 출판되기도 했고(2003년),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부자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다. ‘밥은 하늘’이라는 표현이 참 적절한 비유 같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19절)고 했고, 거지 나사로는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다”(21절)고 했다. 부자가 지옥 가고 나사로가 천국 갔는데 그 이유를 단순하게 보면 밥 때문이다. 정도 이상의 밥을 먹으며 연회를 즐기며, 넘치는 밥을 나누어주지 않은 것이 부자의 죄였다. 나사로는 이 땅에 살며 제대로 밥도 못 얻어먹었기에 실컷 밥 먹게 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품으로 부르셨다.
구약 이스라엘의 주된 문제도 밥이었다.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가 풍요의 신 바알이 밥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알 신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신, 이 신은 여름철인 건기에는 죽고 우기가 시작되는 가을에 살아난다. 비의 신, 태풍의 신이라고도 하는데 이 신을 섬겨야 한 해 농사가 잘되고 풍요가 보장된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은 밥보다 영혼의 양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물론 밥을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이게 바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케 한 이유다. 밥보다는 말씀이 더 소중하고, 말씀을 지킬 때 밥도 주어진다는 우선순위를 강조한 말씀이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가 매일 공급되었다. 한 벌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신발도 낡지 않았다.
밥은 인류의 문제다. 하지만 인간이 밥만 우선하면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정의가 중요하고, 사랑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몸에 밥이 필수이듯 영혼의 양식이 필수라는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
사마리아 여인도 양식이 문제였다. 이 여인의 양식은 남편,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빈 가슴, 이 여인은 그동안 가슴 채우기에 실패했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16)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 실토하면서 자신의 실상을 깨달았다. 이현주 님은 “있지도 않은 그림자에 짓눌려 살아온 나의 지난날을 그분은 안개처럼 흩어버리셨다”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뭔가 항상 목마른 것은 자신을 만족케 하지 못할 것을 추구하기 때문,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자 여인은 질문이 바뀌었다. 예배에 관심을 보이고, 그리스도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25절), 이 말에 예수님은 “내가 그라”(ἐγώ εἰμι)고 하신다. 단순히 그렇다는 인정 정도가 아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할 때 사용하셨던 바로 그 표현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났다.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다. 스스로 영원토록 솟는 샘물, 우리 영혼이 마땅히 먹어야 할 양식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양식이라 하신다(6:46, 51). 하늘 양식이자 생명의 떡, 예수님을 먹어야 우리 영혼은 배부를 수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까지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했다.
이 여인은 드디어 참된 양식을 찾았다. 그 양식으로 배불리자 삶이 달라졌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8-29). 두 가지 변화가 드러난다. ‘물동이를 버렸다’고 했다. 삶의 권태를 상징하던 물동이 아닌가.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찾아갔다’는 거다. 영의 양식으로 배부르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위축되어 사람을 제대로 볼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는데 배가 부르자 이제는 사람이 보인다.
여인은 한발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자신이 배부르지 않으면 절대 못할 일이다. 복음을 만난 자는 그 자신이 복음이 되어 세상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 여인이 즈김 그렇다. 이제 하늘의 풍요로움을 나눈다. 완전 새로운 인생이 된 것이다.
영생하게 하는 영혼의 양식
예수께도 양식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11장에 “예수께서 시장하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그러셨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 시장끼가 사라졌다. 가슴 채우기에 성공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슴은 기쁨과 보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배고픔을 잊으셨다(34절). 사명을 감당하면서 채워진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기쁨이 배고픔을 잊게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4복음서에 ‘보내다’라는 단어가 44번 나온다. ‘아포스텔레인’(apostellein)이란 말로 17번, ‘펨페인’(pempein)이란 말로 27번이다.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온전히 이룬다’(τελειώσω)는 완전 성취, 이 성취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셨다. 그런데 뜻밖에 사마리아에서 만난 이 여인에게서 성취를 맛보셨으니 가슴이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을 잊고 누리신 예수님의 기쁨, 모든 사람들이 다 누리는 것이 아니다. 게으름 피우며 빈둥거린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기쁨, 원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맛볼 수 없는 기쁨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비웃으면서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살아? 편하게 살지”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맛볼 수 없다. 무엇을 할지 목표조차 정하지 못한 채로 방황하던 사람도 맛볼 수 없다. 그들은 놀고먹으며 배를 채우기는 하지만, 삶의 성취감이 없어 늘 가슴이 비어 있다.
우리는 거룩한 기쁨으로 가슴 채우기를 해야 한다. 이게 양식이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책상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열 가지, 백 가지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것,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
1995년에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복음전도자 토딘 트렁 목사가 크호족이란 부족에게 복음을 전한다. 복음전도가 엄격하게 금지되던 때였다. 그런데도 이분은 몰래 들어가서 자전거를 타고 수백킬로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돌아왔다. 그러다가 공안에 들켜서 감옥에 가는데 재판도 없이 6개월을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도 이분은 낙담하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전거 타고 그 더운데 멀리 다니지 않고도 감옥에서 전도하기가 너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분을 파송한 선교단체와 교회에서는 탄원서를 내고, 기도하며 많은 편지를 보냈다. 석방해달라고... 베트남 정부는 압력으로 느낀다. 그래서 그를 방면하고자 나가라고 결정했는데 이 분이 안 나가겠다고 한다. 재판 때까지 그냥 있게 해달라는 거다. 끝내 나가지 않은 그,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 더 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명의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너무도 즐겁다”고 했다. 죽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그, 그는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 완수에만 집중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무슨 일은 하셨나? 그것은 ‘영혼 구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간 동안에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한 생수의 말씀을 전하셨다. 다섯 남자와 살면서도 행복을 맛보지 못했던 여인,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알게 된다. 결국 예수님은 한 생명을 건진 기쁨으로 가슴이 채워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남은 생애를 통해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영혼 구원이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되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눈물과 땀을 통하여 한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될 때, 우리 가슴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고 혹시 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는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혼을 건지는 들판으로 초대하신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5-36절). 예수님은 추수하는 즐거움에 제자들을 초청하셨다. 우리를 초청하신 것이다.
“내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이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 우리의 가슴을 채우는 하늘의 양식이 가슴에 충만하여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