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인생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정복한 자들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우리 안의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을 때 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신 절대자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져 원수로 지내는 상황이라면 마음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명기 1장 30절의 “먼저 가시는”을 원어로 살펴보면 능동분사형의 동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계속해서 이어짐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보다 앞서가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앞서가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야 합니다.
김은호 – 당신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알려 주신 불안의 영적 본질을 기억하는가? 예수님은 불안이 어떻게 우리를 현재에서 납치해 미래의 상실에 대한 시나리오로 끌고 가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시점’이 중요하다. ‘미래’는 불안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다.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납치해 미래로 끌고 가면 납치범이 선택한 영역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미래 속에서만 불안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미래에 대한 다른 청사진을 원하는 이유다. 혹은 이것이 우리 스스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고 각 시나리오의 확률을 계산한 뒤 각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 방안을 구상하는 이유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상실을 완전히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해 주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며, 모든 것의 상실을 경험할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우리의 최종적인 소망인 부활은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완전한 상실을 거쳐서만 가능하다.
커티스 창 – 안녕, 불안
성경은 예수님의 가족들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요6:42) 그리고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는 그의 동생들이다. 그리고 그의 누이동생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마13:55,56,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입니다. 그런데요. 위의 주님의 친형제인 가족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십시오. 그래서 형님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숨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왕 이런 일을 하실 바에는 형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십시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친형제인 그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7:3-5)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친형제인 그들도 예수님을 그 당시에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상진 –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