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2)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오피니언·칼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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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4:3-14
이희우 목사

인간은 관계적 존재, 만남이 중요한데 수많은 만남 중 중요한 만남이 있다. 첫째는 부모와의 만남, 선택할 수 있는 만남이 아니다. 둘째는 스승과의 만남, 선택할 때도 있지만 아닐 경우도 많다. 셋째는 배우자와의 만남, 내가 선택하는 만남이다. 그런데 그 선택으로 인해 평생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필연적인 만남, 구원자로 만나느냐 심판자로 만나느냐에 따라 영원한 행, 불행이 결정된다. 구원자로 만나면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모두가 더 빛나게 될 수 있고, 혹 상처받았던 만남도 치유가 가능하다.

본문의 주인공도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달라졌다. 3장에서 만나셨던 정통 유대인이자 종교계의 거물인 니고데모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인물, 그는 여자였고, 이름도 모른다. 구설수에 꽤 올랐던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녀가 완전 딴사람이 된다.

사마리아에서의 만남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 사역의 주 무대는 갈릴리였다. 거의 모든 사역 기간내내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구조가 심플하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갈릴리와 예루살렘과 요단강을 부지런히 오가며 사역하셨다. 그래서 공관복음서만 읽으면 예수님의 사역은 1년 정도로 보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3년 이상으로 보인다.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신 곳은 갈릴리 가나였고,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신 사건과 니고데모를 만나신 곳은 예루살렘이었으며, 침례 요한 관련된 기사들은 요단강 근처에서 일어난 일, 이번엔 무대가 사마리아로 바뀐다.

사마리아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도시,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갈릴리에서 유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이곳을 통과하면 빨리 갈 수 있다. 문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BC 721년 앗수르에 점령당했을 때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사람들은 이방 민족의 통혼 정책 때문에 유대인의 순수성을 잃고 말았는데 그 후부터 유대인들에게 괄시받는 곳이 되며, 사마리아인이 개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그 땅도 밟지 않으려고 요단을 가로질러 해안선을 따라가는 길이나 베뢰아를 통하는 우회로를 택해 다닐 정도였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 이 한 마디가 그들의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요단강에서 갈릴리로 가신다. 북쪽으로 바로 가면 바로 가는 거다. 굳이 사마리아로 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굳이 통행 기피 지역인 사마리아로 돌아서 가신다(3-4절). 의외의 선택, 헬라어 원문의 ‘데이’(δεῖ)라는 단어는 ‘마땅히 해야 한다’ 또는 ‘반드시 될 것이다’라는 뜻, 영어로도 must, 반드시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다고 한다.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가셔서 사마리아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고, 그 만남을 계기로 사마리아의 복음이 되신다. 결국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반드시 가셔야 했던 것,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어쩌다 마주친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부터 계획된 만남, 필연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시인 류시화 님의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에 보면 인도의 한 요가 성자와의 만남 이야기가 나온다. 류시화 씨가 어렵게 그 성자를 만났는데 만나자마다 그가 대뜸 한 말이 “왜 이제 왔어”였단다. 전생에 만나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화를 냈다는 거다. 우리는 전생을 믿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믿는다. 우리에게도 예비된 소중한 만남이 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만나는 것, 이 만남은 이유가 있는 소중한 만남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우물가에서 이루어졌다. 우물가 미팅은 중동에서 흔한 미팅, 그런데 사소한 우물가에서의 미팅이 아니다. 너무 중요한 만남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피곤해 앉으셨다는 것으로부터 그날 일을 남겼다(6). “물 좀 달라”, 이건 가상칠언(架上七言), 즉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내가 목마르다”(19:28)고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니신 것도 아니고, 말 타고 다니신 것도 아니며, 뜨거운 태양 볕을 걸었기에 피곤하셨다는 것, 두레박이나 도구가 없었던 예수께서 “물 좀 달라”(7)며 다가가셨다고 했다. 접촉점을 만드신 것, 의도적인 접근이다. 젊은이들 말로 작업(?) 들어가셨다고 할까? 그런데 사실 이 “물 좀 달라”는 말은 자신의 목마름보다는 여인의 마음속의 갈증을 예수께서 대언하신 것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시장하셨다고도 했다. 나중에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셨다고도 하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지만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 예수,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을 잘 아시는 그 분이 사마리아로 찾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됐다.

목마른 여인과의 만남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려고 나온 시간은 유대 시각으로 여섯 시,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정오다. 중동에서 매우 뜨거운 시간,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고 낮잠 자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혼자 물을 길으려고 나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의 눈과 손가락질을 피해 산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권태감에 사로잡혀 그 시간에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그 여인은 목마른 여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경멸의 눈짓과는 달리 정중하게 “물 좀 달라”고 하신다, 의외의 요청에 당황했을까? 여인의 대답이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이다. 가시가 돋힌 것 같다(9절). 그냥 주면 될 걸 굳이 민족적 편견을 문제 삼는다. 목마른 나그네의 고통보다 잽싸게 스캔하고는 유대인 아니냐 그런다. 사실 예수님의 요청도, 이어지는 대화도 정상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여자와의 대화를 꺼렸다. 랍비들의 격언에는 “아무도 길에서는 여자와 말하지 말라.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여자를 부정하게 생각했는데 더구나 사마리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선언하신다(10절). 여인은 즉각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물었다. 기대가 없다.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마음의 여유도 없다. 믿는다는 것은 기대를 갖는 것, 그 기대가 신비를 만들어내고 기적을 만들어내는데 기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신다(13-14절). 여인의 반응은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 생수에 대한 갈증을 표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삶에 지친 사람의 짜증 섞인 말, 마치 푸념조 같다. “그래요? 그럼 이제 고생 좀 끝나게 해주시죠” 좀 꼬인 듯한 뉘앙스다. 권태감이랄까? 그녀는 지금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

속이 썩어서 문드러진 여인, 꼬일대로 꼬인 여인에게 예수님은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또 말씀으로 다가가신다. 복음서에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통은 한두 마디가 오간 다음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는데 이 여인과는 무려 6번이나 대화를 주고받으신다. 예수님은 이제 이 여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터치하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피하고 가린다고 가렸는데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가 드러난 느낌이지만 이게 핵심이다. “남편이 없나이다”(17절) 잘 버텨왔는데 이제는 다 무너지는 느낌, 얼마나 아픈 대답인가? 가슴이 찢어진다. 상처 입고 한이 맺혔는데 예수님이 정곡을 찌르신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이 여인을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여자로 치부하면 안 된다. 편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책망하지 않으셨다. 특별히 죄가 많은 여성이라기보다 굳이 특징을 짓자면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여자,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사랑을 많이 한 여자다. 자기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인데 결혼생활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기구한 운명으로 산 여인이다.

물론 지금까지 인생의 만족을 결혼, 남편에게서 찾았던 것은 분명하다. 행복의 근원이 오직 남편의 사랑이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차단되었던 고대사회에서는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은 유일한 소망이었기에 헤픈 여인 취급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가 있는데 남편이 없다고 한다. 비정상적으로 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만족을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실망하고 실망하면서 물 먹듯 갈아치우며 살았을까?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다섯 번 결혼하고 깨지면서 상처를 입을 대로 입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 체념하며 살고 있다.

이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라 한 것이 사마리아 민족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마리아가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 이렇게 다섯 개의 혼합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왕하17:24). 그런데 우리와는 무관할까? 아니다. 죄 많은 여인, 남자 밝히는 여인, 행실이 나쁜 여인이 아니라 이 여인은 보편적인 사람을 대표한다. 우리와 성정이 같다. 우리에게는 욕망이 없나? 드러나는 것은 차이가 있지만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 연구로 보면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내면은 판도라 상자와 같아서 뚜껑을 열지 않아서 그렇지 열고 들여다보면 별의별 게 다 들어있다. 우리 중에도 이 여인처럼 인생의 코너에 몰린 사람도 있고, 우리는 모두 다 목마른 인생, 이 여인의 목마름이 우리의 목마름이다.

하지만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신다(14절, 사55:1). 목마른가? 그건 우리가 나온 바 근원을 찾으라는 영혼의 신호이다. 주님은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7:37-38).

변화를 주는 만남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은 대화하는 가운데에 딴사람이 된다. 지난날의 잿빛 생활을 정리한다. 새사람이 된 거다. 그동안은 헛된 소망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희망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 미국 미시간에 어떤 처녀가 부모의 말을 안 듣고 가출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처녀는 타락하여 창녀가 되었다. 몸을 팔면서 지냈는데 더 이상 몸도 팔지 못해서 마약을 살 수조차 없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추운 도시에 터미널에서 신문지 한 장 덮고 잠을 자려는데 부모 생각이 났고, 하나님의 사랑이 생각났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서 집에 전화를 하고 돌아기로 결심한다. 7시간에 걸쳐서 집으로 가는데 별생각이 다 들었다. 만일 부모가 받아주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것이고, 다행히 용서해 주면 용서를 빌고 재생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한 거다. 드디어 고향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책에 보면 삼촌, 조카, 할머니, 할아버지, 마을 사람까지 다 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한다. 악단도 데리고 와서 환영 연주회를 해준다. 결국 딸이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 재생의 길을 걸었다는 거다.

한 많은 사미리아 여인을 주님이 만나주셨다. 끝없는 사랑으로 손잡아 주셨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성경에 보면 그 감격이 예배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되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를 찾기 때문이다. 예배는 생수를 얻는 통로다. 예배를 통하지 않고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예배가 형식이 되면 안 된다. 타성에 젖어 드리는 예배가 되어도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 여인의 변화된 모습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예수님을 만나니 그 배에서 생수 정도가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 메마른 사막이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 혼자 시원함을 느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수의 강이 되어야 한다고 동네로 뛰어간다.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아닌가? 정말 속이 후련해졌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 그 여인은 이제 상처입은 치료자가 된다. 깨끗하게 고침받았기에,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제는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른 현실로 인해 예수님을 만났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사마리아까지 찾아가신 것이 부럽나? 우리 삶의 현장에도 찾아와 주시지 않았나? 우리가 입은 상처도 다 씻어주시지 않았나? 꼭 예수님 만나야 한다. 그래서 맛깔나는 삶을 살며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 주님이 오늘도 정말 만나고 싶어하는 관심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다. 주님과 함께 행복의 문을 활짝 여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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