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들은 특징이 있다. 남은 자들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인생을 기다리지 않는다. 남은 자들은 아침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와 같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한다. 나는 남은 자다!(I Am the Remnant!) 나를 향한 그 부르심을 수락하겠는가?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흔드는 제자 중의 제자! 지금은 택하신 남은 자들이 일어날 때다. 나는 남은 자다!(I Am the Remnant!) 지금은 남은 자가 사람들을 구조하고, 소생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세상에 풀어놓아야 할 때이다. 남은 자의 삶은 포기의 삶이 아니다. 배신의 삶이 아니다. 좌절의 삶이 아니다. 불신의 삶이 아니다. 불만의 삶이 아니다. 눈물의 삶이 아니다. 결코 부정의 삶이 아니다. 남은 자의 삶은 긍정적인 삶이다. 믿음의 선진처럼 인내하는 삶이다.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삶이다. 승리의 삶이다. 감사의 삶이다. 섬김의 삶이다. 기쁨의 삶이다. 헌신의 삶이다. 영광의 삶이다. 영원한 기대하는 부활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 신학’의 결론이다.
박영호 – 남은 자 신학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동시에 한 마디로 명료하게 전하려면 기독교의 3대 보물인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잘 설명해주면 된다. 이 이상의 집약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약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공저자는 기독교의 3대 보물만큼은 교회학교 교육과 가정교육에서 반드시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 아이 때부터 시작하는 성경과 교리를 근간으로 하는 교회학교의 ‘말씀 교육’과 책임있는 크리스천 부모로서 가정에서의 ‘말씀 교육(자녀교육, 성경암송 등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육에 있어 특히 ‘개념화 작업(conceptualization)’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그러하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한 우리 개개인들 또한 그들과 동일한 신앙임을 드러내는 고백인 것이다. 그런 ‘사도신경’에는 기독교의 근본(beginning, foundation)과 본질(Essence)이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잘 요약되어 있다. 그렇기에 신조를 통하여는 이단과 사이비를 걸러낼 수 있으며 정통 신앙에서의 주류가 지향하는 바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신조를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Christian Identity)과 소속(하나님나라 소속, 하나님의 소유, 자녀)을 밝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선일, 이성진, 김선민 – 기독교의 3대 보물
진리의 등불이 다시 빛나게 불타오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열릴 때 어둠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 가운데 물러가게 될 것이다. 빛의 귀환이다. 이 빛은 수천 개의 반짝이는 면으로 그 빛을 발할 것이다. 그 찬란한 광채는 모든 보석 , 즉 주님이 친히 부르신 모든 일꾼을 통해 저마다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루터, 츠빙글리, 파렐, 칼뱅, 녹스, 불링거, 베즈가 바로 그 일꾼들이다. 이들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전투에 참여하도록 부르신 전사들이다. 위인? 부자?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부서진 사람들일 뿐이다. 주님께 붙들린 사람들이다. 세상을 뒤집어엎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다.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잊힌, 알려지지 않은 , 기억되지 않은 사람 피에르 비레이다. 그는 변변찮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떠들썩하게 죽음을 맞지도 않았으나 하나님에 의해 부서지고 붙들린 사람이었다. 부자도 아니었다. 그의 이름에는 왕족이니, 귀족이니 하는 신분을 드러내는 장식도 일절 없다. 명망 있는 가문도 아니다. 그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한 사람일 뿐이다. 이 사람이 바로 16세기 위대한 종교개혁의 새벽에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 피에르 비레이다.
레베카 쉬츠 – 피에르 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