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觀點, Perspective)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말한다.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만사가 다르게 느껴진다. 관점 디자이너(Perspective designer)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 사건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만 잘 디자인하면 얼마든지 인생은 새로워질 수 있다.
최근 국민일보 종교국 부국장인 이태형 기자로부터 <더 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두 권의 책을 선물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도전과 모험의 인생을 즐기는 한비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독특한 인생을 즐기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이틀에 한 번씩만 잠을 잤다고 한다.
"하룻밤을 새운다 하더라도 고작 여섯 시간 자지 않는 것이잖아요. 밤을 새우며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잠에 대한 관점을 뒤바꿔놓는 발상이 아닌가? 그는 결코 사람들이 정해 놓은 시간표에 갇히길 거부했다. 자기 나름의 시간표를 갖고 살아간다.
"50대. 축구로 따지자면 전반전 끝나고 후반전 5분 정도 지났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후반전에 결정 나잖아요. 골도 후반전에 많이 들어가고요. 전후반에 결정 내지 못하면 연장전도 있습니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 페널티킥으로 결정합니다. 그때 모든 것이 결정 날 수도 있어요. 가끔 재경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 네트워크를 합해 50대에 활짝 필 것입니다. 책을 여러 권 썼는데, 작가로서는 70대가 전성기일 수 있어요. 자금까지는 설익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때까지 인생을 잘 살면 더 깊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산을 하다 보면 5부 능선에서 보는 경치와 7부나 9부 능선에서 보은 경치가 완전히 다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무엇을 대하든 관점만 바꾸면 된다. 문제는 상황이나 사건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관점의 문제다.
일본 아오모리현은 사과 재배로 유명하다. 그런데 1991년에 그곳에 기록적인 태풍이 불어닥쳤다. 1년 동안 땀을 흘려 수고한 사과 수확을 눈앞에 둔 때였다. 그런데 태풍으로 사과의 90%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상품가치가 있는 사과는 겨우 10% 남짓 남았다. 농민들은 비탄에 빠쳤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하늘만 원망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외의 일이 생겼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10%의 남아 있는 사과를 바라보고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왜? 남은 10%의 사과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한 태풍에도 불구하고 끄덕하지 않고 떨어지지 않은 사과가 아닌가? 그래서 그 사과의 이름을 '대입합격 사과'라고 붙였다. 물론 가격은 다른 사과들에 비해 10배 이상을 붙였다. 그런데도 수험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기록적인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간단한 관점 바꾸기로 대박을 쳤다.
어느 목사님에게 딸이 있었다. 딸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녀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혼쭐을 내주기도 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의 딸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짧은 옷을 입고 다니냐? 남사스럽게." 그 옆에서 듣고 있던 분이 권사님에게 말했다. "그럼, 할머니가 돼서 짧게 입겠어요?"
어느 며느리가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는 항상 우리의 건강을 먼저 챙기신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당신 아프신 얘기와 어머니 동네 할머니의 자식들 얘기, 그리고 서방님 도와 달라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어머니께서 전화하셔도 바로 받지 않을 때도 있다. 기분이 더 다운될까 싶어서. 그리고 한 두어 시간 지나고 전화 드리곤 한다."
임신 3개월인 임산부가 있다. 시댁에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애기 가졌을 때는 잘 먹어야 한다. 과일도 예쁜 거 먹고." 그런데 그게 끝이다.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아무 말 하지 않았더니, 자꾸 물어보신다. 그러더니 친정 오빠 편에 10만원 붙여 보냈다. 연세 드신 친정 엄마는 말한다. "난, 아무 걱정 말아라." 그러나 시어머니는 말한다. "난 너희 믿고 산다."
친정 엄마는 바쁜 딸내미한테 주려고 더덕을 까고 양념장 재어 구워먹을 수 있게 보내주신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좋은 더덕이라며 껍질채 보내주신다.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는 정말 다르다. 마음 씀씀이부터, 대하는 태도까지. 그래서 며느리 입장에서 은근히 짜증날 때가 많다.
그럼 시어머니는 할 말이 없을까? 며느리의 마음을 훔쳐 보라.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친정 엄마가 아프면 마음이 아프다. 왜일까? 다 알고 있는, 감추고 싶은 비밀 아닌가?
며느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있다. 김치 담아서 아들네 아파트 수위실에 맡겨두고 말없이 돌아가는 시어머니! 이렇듯 다르다. 딸을 대하는 친정 엄마의 관점과 며느리를 대하는 시어머니의 관점이 천양지차다. 시어머니를 대하는 며느리의 관점과 친정 엄마를 대하는 딸의 관점도 그렇다.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의 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끌고 왔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도 이렇게 다루고 싶은 심정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소?"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면서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잠시 후, 사람들은 손에서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고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탄의 왕국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관점에서 여인을 다루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잣대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의 잣대로 여인을 대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탕자의 형의 관점에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인을 바라보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정죄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해석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처리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자리에 서 있는가? 예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죄인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진다.
교회에서 중직자를 세우는 투표를 했다. 어떤 이는 당선되었지만, 어떤 이는 떨어졌다. "내가 이 교회에서 이것밖에 안 돼? 지금까지 수고한 게 어딘데?" 그는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생각한다.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구나. 하나님, 저에게 부족한 게 뭐에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해 주세요." 그는 영적인 진보를 위한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았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아닌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상처는 내가 주고 내가 받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은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어떤 사람은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당신은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가?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게 부정적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은 매사가 아름답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눈들을 보라. 사울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장군들, 심지어 다윗의 형들까지 생각은 일치했다. "저 무시무시한 골리앗 좀 봐. 그의 광기 어린 호령소리를 들어봐. 우린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의 관점은 달랐다. 인간적인 관점에 머무르지 않았다. 믿음의 관점으로 골리앗을 바라보았다. 강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이 도우시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 곰도 사자도 때려눕혔던 경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