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8) 니고데모와의 만남(2) 거듭나야 하리라(2)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3:5-15
이희우 목사

고1 때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교회 언덕을 막 오르는데 고3 누나가 다가와 갑자기 “너 구원 받았니?” 질문을 해서 엉겹결에 “예배 끝나고 얘기해 주겠다”고 답한 적 있다. 예배 시간 내내 뭐라고 답할지 몰라 고민했다.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구원을 확신한다고 해도 되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거의 강조하지 않았다. 정말 고민이었다. 다행히 그 누나는 예배가 끝난 후에 묻지 않았고, 그 후에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그 누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대학 들어가 CCC에서 사영리 교육을 받고, 구원의 확신에 관한 소책자를 공부하면서 ‘거듭나는 것과 구원의 확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거듭나야 하리라’, 너무도 중요한 말씀이다.

거듭남의 비밀

‘거듭남’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3절). 그런가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는 거듭남을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셔서 은혜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며 “회심 또는 중생의 교리를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교리”라고 했다. 거듭남은 혁명 같은 것, 생명을 얻는 구원의 정론(正論)이며 ‘소속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장 큰 은혜이자 가장 소중한 신앙적 삶이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대중화시킨 ‘거듭남’, 1970년도에 『Born Again』이라는 책을 쓴 후 그의 메시지 초점은 늘 ‘거듭남’이었다. ‘거듭남’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된 것, 그는 ‘거듭남’이 없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역설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야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신27:1-2) 다 지키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쉬운 길을 여셨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거다(5절). “영으로 난 것”, 3절, 5절, 6절, 8절에 ‘거듭난다’와 ‘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성경은 그 비밀을 점점 드러낸다.

사용된 헬라어는 ‘아노센’(ἅνωθεν)과 ‘겐나오’(γεννάω), ‘겐나오’는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게네세 아노센’ 이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출생 사건에 비유한 것, 하지만 거듭나라는 말이 어머니의 모태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라는 말은 아니다. 출생부터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는 거다. ‘아노센’은 ‘위로부터’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하늘로부터 태어나라는 뜻(from above), 이건 신기원이다. 내 지식, 내 경험, 내 판단은 의미 없다. 어떻게 하늘로부터 나나? 그것은 성령으로 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뚜렷하고, 귀신 들린 것 같은 현상도 없는데 영으로 난다? 무슨 말인가? 성령이 느껴지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것일까? 시원하게 답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믿음으로 알 수 있다거나, 바람 같은 성령이라 인식할 수 없다는 정도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인간적인 수행이나 사람들이 만든 종교, 또는 사상이 제시하는 길이 아니라 성령의 길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마치 바람 같아서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8절). 이해인 시인이 “얼굴이 없어도/ 항상 살아있고/ 내가 곁에 있어도/ 내 곁에 먼저 와 있는 너”라며 바람을 “잊을 수 없는 친구, 나를 흔드는 그리움”이라고 한 바람, 요즘이야 바람의 원리를 알고 기상 예측도 가능하지만 이전 사람들은 맨날 부는 바람이어도 바람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성령의 역사도 그렇다는 말씀, 하늘의 일이라 믿기 어려울 수 있다(12절).

결국 인간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그 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유명한 말을 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노력은 허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인생은 밝은 새벽이 없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주연배우가 없는 연극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엄청난 폭탄선언을 하신다. 당신이 유일한 길(The Way)이라는 거다(요14:6). 인간적인 것으로는 어떤 희망도 구원도 없으니 나만 믿으라는 선언이다. 교만한 것 같은 말씀, 배타적인 말씀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모든 이념과 사상도 사회가 나아지는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말씀은 그들의 주장을 다 “뻥”이라 한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육이요, 땅의 일이요, 땅의 논리라는 것, 그 논리로는 하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갖출 것 다 갖춘 니고데모가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한다. 모든 인간이 다 늪에 빠졌다는 말이다. 허우적댈수록 오히려 깊이 빠져들 뿐, 밖에서 던져진 밧줄로만 늪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의 설교에 보면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채를 끌어올린다고 사냐고 묻는다. 아웃사이드에서 던져주는 밧줄 잡아야 산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어떤가? 혹시 니고데모 수준은 어닐까?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90년경의 기독교는 니고데모와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지금도 구원을 교리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리로 구원받을 수 있나? 사영리(四靈理) 식으로 도식화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논리가 되는 것 아닌가? 사영리는 너무 즉시 안심시키지만 구원은 우리가 안심하다고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은 거짓, 그림자, 망상이다. 이 절망을 느껴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거듭남은 비밀이라고 표현한다.

물과 성령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 하셨다(5절). ‘물과 성령’, 물은 깨끗하게 하는 것의 상징, 침례(세례)와 관련이 있고, 유대인의 희생 제사에 필수요소였다. 그래서일까? 당시에는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침례(세례)를 베푸는 관습이 있었다.

침례(세례)요한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했고, 이 촉구를 받아들여 회개한 자에게 침례(세례)를 주었다. 욥바의 베드로가 청함받고 고넬료와 가이사랴의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임하자 그들에게 침례를 준 적 있는데(행10:44-48) 이는 선교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빌립이 이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침례를 준 것(행8:4-17)도 선교 역사상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 두 침례(세례)가 다 “성령의 침례(세례)”였다는 것이 의미있다.

침례는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을 상징하지만(롬6:4-5). 세례는 깨끗하게 씻음을 의미하기에 로마서의 말씀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사는 거듭남, 깨끗하게 되는 성결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게 구원의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깨끗해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지 않으면 의미 없지 않나? 반면에 많이 부족해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면 사는 것 아닌가.

사도행전 18장에 아볼로라는 목회자가 등장한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그가 에베소에 와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요한의 침례(세례)만 알 따름이라”이라고 했다(행18:25). 그때 그의 성경 강해를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데려다가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친다. ‘예수에 관한 것’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6장에 고린도교회가 아볼로를 목회자로 보내달라고 바울에게 부탁한 것을 보면 아볼로는 당대에 가장 걸출한 지도자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너무도 중요한 일을 한 것이다. 아볼로에게는 터닝포인드, 멘토를 잘 만나면서 사역이 달라졌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했다(요19:34). 피는 구원을 의미하고, 물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피는 받아들이면서 물은 간과한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변화는 원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쁘게 살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피와 물 다 받아들여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물 침례(세례)와 성령 침례(세례)가 다 필요하다는 말이다.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상징, 그래서 침례(세례)를 무시하면 안 된다.

요한은 하나님의 지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했다(요1:13). 물과 성령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물은 인간에게서,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물도 성령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형식도 내용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은 성경에 형식을 꼼꼼히 일러주신다. 제사나, 제사장의 옷이나, 규범이나, 생활이나, 신앙이나, 음식에 대한 형식을 소상히 일러주신 것이다. 이게 구약성경에 가득 차 있는 내용들이다. 구약만 그런가? 신약에도 예수께서 이런 형식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물과 성령은 거듭남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여전히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책망은 맞지만 핀잔 주려는 것은 아니다. 모르면 들으라고 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님은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말기에 벌어진 일인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특기를 살려 하나님을 원망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민21:5). 이번에도 먹는 것 가지고 시비를 건 것,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 한다. 원망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거인데 하나님의 역사를 원망을 넘어 악평까지 한 것이다.

그래서 벌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백성들을 심판하셨다. 뱀에 물려 죽은 자가 많았다. 그런데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 형상을 만들게 하셨다. 그리고는 뱀에 물린 자들에게 장대에 단 그 뱀 형상을 바라보라 하셨다(민21:8). 놀랍게도 그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말씀대로 살아났다(민21:9). 쳐다만 봐도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장난하는 거야. 뱀은 꼴도 보기 싫어’ 그러며 자신의 경험을 의지해 약 바른 사람들은 다 죽었다. 약 바르는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조건, 하나님의 방법이 있는데 자기를 의지하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놋뱀만 쳐다보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순종했던 사람들은 다 살아났다. 놋뱀에 어떤 능력이 있었다기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따르는 순종이 능력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순한 순종을 보고 고쳐주신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여야 하리라”(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고 하셨다. 여기서 ‘들린다’는 단어는 13절의 ‘올라간다’와 동의어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치켜든 사건과 빗대어 장차 당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들려진다는 말씀이다. 아울러 예수님의 승리가 암시된 영광 받으실 주이심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결코 패배와 굴욕이 아닌 승리와 영광,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을 드러내며 십자가를 통해 오히려 영광 받으신다는 뜻이다.

못 알아듣는다고 알아들을 얘기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니까 더 깊은 가르침으로 진도 나간 셈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아 말씀이 요약이고 결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놋뱀을 쳐다 본 자들이 산 것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을 믿고 바라보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 하셨다. 드디어 계시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선포였다.

놋뱀 사건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제시하시려는 복음을 완벽하게 표현해준 사건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인자가 들림받는 것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생명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생명(요17:3), 레온 모리스가 살몬드(S.D.F. Salmond, 『the Christian Doctrine of Immortality』)의 말을 인용하여 표현한 ‘변하지 않고, 썩지 않고, 꺼지지 않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모든 개념, 생명이 주는 선함과 온전함을 다 만족시키는 생명’이다.

주님이 생명을 주시려는데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마치 사면받은 죄수가 출옥하면 세상에서 밥벌이하고 힘들게 사는 것이 싫다며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감옥에 남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믿으면 구원이고, 믿으면 영생이다. 큰 죄 지은 적 없다고 외면할 건가? 절대 죽을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 믿고 거듭나는 은혜를 누리고, 거듭난 사람들은 승리와 영광의 주님이 예수님의 본질이자 우리 찬양의 주제임을 믿고 더욱 더 합당한 삶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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