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간토대지진 100주년, 역사적 진실 외면·부정한다고 지워지지 않아

오피니언·칼럼
사설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본 간토지방에 대지진이 닥쳐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의 뇌리에 그날을 잊을 수 없는 건 당시 사회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방화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본인 자경단과 경찰, 군인 등에게 살해당한 조선인이 6천여 명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본 도쿄 부근 간토지방을 덮쳤다. 지진과 함께 발생한 큰불로 희생자가 10만여 명에 달했다. 더 큰 비극은 대지진 직후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혼란을 틈타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 살해가 자행됐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조선인학살에 대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지만, 일본은 이 역사적 진실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얼마 전 일본 국회에서 “조선인학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한 야당 의원의 질의에 정부 각료는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응할 수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정부 차원에서 집단 학살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과 6천여 명이 살해당한 비극적인 사건의 실체적 진실 사이에 아직도 깊은 골이 존재함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지난 1일 일본 도쿄에선 간토대지진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이 열렸다. 해마다 있어 온 행사지만 올해는 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한국 국회의원과 일본 전 총리 등 한일 정치인 다수가 참석했다.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하루 앞둔 8월 31일 일본 도쿄에선 당시 희생자의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규명과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추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도 있었다.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한국 정부과 민단이 주최하고 한일 국회의원 다수가 참석한 추모행사를 외면하고 친북단체인 조총련이 주최한 행사에 홀로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국가단체에 동조한 사람이 과연 국회의원 자격이 있는지 논란이 일고 있다.

윤 의원이 참석한 행사엔 북한에서 노력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1급을 받은 허종만 의장 등 조총련 지도부가 대거 참석했다. 추도사를 낭독한 조총련 간부는 한국 정부를 “남조선 괴뢰 도당”으로 불렀다. 윤 의원이 개인 일정이 아닌 국회의원의 공무임을 내세워 주일 한국대사관 측으로부터 온갖 편의를 다 제공받고 이런 자리에 버젓이 참석했다니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알다시피 윤 의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시절 후원금 사적 유용 및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져 2021년 6월 민주당에서 제명돼 출당조치 됐다. 이런 사람이 자중하진 못할망정 친북 행사에 들러리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시스템 가운데 교묘하게 침투해 있는 공산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종북주사파를 공식 언급했다.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는 현실을 지적한 건데 이번 윤 의원의 일탈 행동처럼 정치 종교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반국가세력의 준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이를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다.

한편 기독교계도 이날을 기억하는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지난 2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새문안교회에서 ‘간토대지진 100년과 한일 기독교’라는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당시 기독교가 이재민을 위한 의연금 모금 활동에 앞장선 내용 등이 집중 조명됐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서울, 인천 등지에서 가장 먼저 의연금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그중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게 종교계, 그중에서도 기독교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일제의 압제 아래서도 참혹한 재난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당시 기독교계가 정치 논리가 아닌 복음의 가치 실현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일본 사회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고, 일본 언론도 이 문제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들이 저지른 ‘조선인학살 사건’에 대해선 거리를 두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 일본은 대지진으로 많은 국민이 희생되는 참사를 겪은 피해자이자 동시에 그 피해의 책임을 아무 잘못이 없는 조선인에게 씌워 무참히 인명을 살상한 가해자이다. 일본 정부가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있지만, 당시 조선인 수천 명이 희생된 사실을 부인한다고 그 진실까지 지워지진 않는다.

최근 한일 두 나라 사이에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으나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최소한 부정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