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은 대상이 있다. 분명하고 특정한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 가능하다. 사랑에 대상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사랑이란 받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이 특정되지 않으면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위대해 보이고, 수많은 문학 작품이 돌려받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지만, 돌려받지 않는 사랑은 신의 영역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그 사랑은 소진되고 만다. 사랑하는 자에서 시작하여 사랑받는 자로 전환하는 과정이 사랑의 여정이다. 사랑은 시작부터 상호성을 목표로 한다. 사랑은 상호 대상성을 갖는다. 결핍을 채우는 사랑은 연인 간의 사랑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주인공 한스는 아버지의 억압과 학교의 규칙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유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스의 룸메이트 하일러는 규칙을 하찮게 여기며 자유를 만끽하는 소년이었다. 한스는 낯선 하일러에게 빠져들었다. 결핍의 보충으로서의 대상을 열망하는 것은 이처럼 연인 간의 사랑뿐 아니라 우정에서도 나타난다.
권요셉 – 나는 왜 불안한 사랑을 하는가
“이방 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 즉, 이방 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헤맨다.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 무지(無知)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마치 ‘적막한 우주를 떠도는 버려진 별이나 작은 먼지’ 같다고 느끼는 의식 상태를 갖고 태어난다.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는 것이 ‘죄’로 인해 겪는 ‘소외’(alienation)의 자각(自覺)임을 알려 준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무관심하거나, 혹은 진노와 심판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어떤 낯선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비와 은혜로, 진리와 공의로, 무엇보다 긍휼과 사랑으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그리고 피조 세계를 계속해서 찾아오신다. 처음부터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 말씀을 버린 인간과 그 세상을 또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뿐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시고, 기적을 통해 찾아오기도 하신다. 성경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채영삼 – 신약성경의 이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너의 고통 속에서 나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의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네가 가는 곳은 회개의 눈물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 회개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지는 것이 나의 뜻이다. 나의 자녀들이 이 회개를 통해서 나의 보혈의 옷을 입기를 원한다. 너무나 시간이 없다. 어서어서 회개하거라. 어서어서 회개로 준비하거라. 나의 순결한 신부들이여,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 나는 통곡한다. 너희의 그 안일하고 나태한 믿음으로는 결코 나를 만날 수가 없는데 어찌할까? 내 백성아. 지금이로다. 일어나거라. 회개하고 기다리라.
지귀복 – 예수님의 사랑 그 놀라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