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가셨다’는 표현보다는 ‘돌진하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다르다. 공관복음서의 구조는 단순하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는 갈릴리였고,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다. 그래서 공관복음서만 읽으면 유월절이 한 번만 나와서 예수님이 마치 사역을 1년 정도만 하신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가 아예 유대 땅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적어도 세 번 방문하신다(13절, 6:4, 11:55).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을 이렇게 자주 방문하신 이유는 성전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루살렘이 권력의 중심, 수도 같은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은 항상 올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님은 왜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에 그것도 돌진하듯 가셨을까? 그것은 마치 유대교의 심장부를 치고, 유대 종교의 실패와 한계를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한 방문처럼 보인다. 본문 사건도 다분히 그런 측면이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쫓으신다. 소란을 일으키신 것, 유대교가 맛 잃은 맹물 종교가 되었기에, 이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일으키신 소란이다.
요한은 2장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더럽혀지고 오염된 성전을 정화시키려고 소란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2장 전반부(1-11절)에 기록된 가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일과 본문의 성전 소란 이야기를 대조시키고 있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포도주 사건 바로 다음에 이 이야기를 배치했다. 혼인 잔칫집의 포도주가 상징하는 ‘구원’과 성전에서의 ‘심판’을 대비시킨 셈이다. 결국 가나에서는 사람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셨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주셨다. ‘성전 소란 이야기’, 성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성전의 본질
예수님은 유대 최고 명절인 유월절 즈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마치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려고 가신 것 같다. 유월절이 어떤 절기인가? 기본적으로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 이스라엘의 민족 해방절아닌가? 각처에서 모여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때, 메시아 신앙이 한껏 더 고조되는 때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점령당한 상황,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가 제공하는 희망은 헛된 것, 참된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빛을 영접할 때 거기에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있다. 예수님은 성전 소란 사건을 통해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다.
당연히 정치적 행보는 아니다.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시는 모습이 유대인들 눈에는 열심당 운동의 일종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들의 눈은 현실적이며 정치적 해방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인해 더럽혀졌던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씻는 수전절 사건이 있었다. 수전절은 요한복음에서만 언급되는 절기다(10:22).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성전 소란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소란 이야기를 착취행위에 대항한 혁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스라엘의 해방과 전혀 무관한 방문은 아니다. 하지만 목표가 다르다. 일시적 해방이 아니라 영구한 해방, 예수님은 정치 혁명이 아니라 자기 혁명을 원하셨다. 그래서 권력의 중심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방문하시지 않았다. 모인 무리도, 예루살렘의 유적도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성전이었다.
성전이 어떤 곳인가?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한 심볼이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잇는 위대한 상징이다. 성전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이해할 길이 없다. 성전의 본질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집’(16절)이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난다. 성전은 하나님이 주인이며 머리이시다. 또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서,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성전은 오직 하나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봉헌되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이라고 하셨다. 경건과 하나님 경외의 영적 분위기가 넘쳐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면서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바로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전부터 찾으셨다. 우리의 관심도 마찬가지, 성전 우선, 성전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변질된 성전
그런데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성전 뜰을 밟고,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성전을 살펴보기 원하셨는데 웬일? 성전 뜰이 엉망이다. 그 뜰은 이방인의 뜰, 이 이방인의 뜰부터가 성전인데 형편없다. 기대와는 완전 딴판, 가축시장, 시장 잡배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핵심과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뻔뻔스러운 종교적 모임에 불과한 성전,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는데, 제사장들은 트집 잡아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당국자들은 도로 가져갈 수 없는 제물을 헐값에 사들여 성전에서 비싼 값에 되팔았다. 성전에서 파는 제물은 쉽게 합격 판정을 받았기에 비싸도 선호되었고, 당국자들은 이것을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타락한 제사장들은 장사꾼들과 결탁해 커미션(commission)을 챙겼다.
또 당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성전세 반 세겔을 바쳐야 했는데 그 돈은 주화에 이방 군주나 우상의 그림이 없는, 순도 높은 은 주화여야 했다. 제사장들은 유월절 20일 전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환전소를 설치하고 12.5%의 환전 수수료를 챙겼다. 그러니 성전을 더럽힌 자들은 성전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평생 소원이 죽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드리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이용해 실제로는 자신의 배만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성전 뜰 안에서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매매 행위, 예수님은 가슴이 쓰라리셨다(막11:17). 결국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열심이 폭발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 예배드리는 집이 아니더냐? 그런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가축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채찍을 들어 가축들을 내쫓으셨다. 그리고 환전상과 의자들을 뒤집어엎으셨다. 예수님은 성전이 세속화되고 상업화되는 것, 이기적인 욕심쟁이의 소굴이 되는 것, 그리고 형식주의, 편의주의가 난무한 기쁨이 없는 성전이 되는 것에 분노하며 진노의 채찍을 드셨다. 성전의 본질과 핵심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빠진 예배를 드리며, 어떻게 하면 높이 올라갈 것인가만 생각하며 돈 벌 꿈만 꾸고 있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 사건은 흔히 말하는 청소사건이 아니다. 폭력적인 난동 사건, 예수님은 아예 제사를 방해하셨다.
그동안 필요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허용했던 관행이 사실상 적폐(積幣)였다. 장사치들은 이곳에서 큰 이익을 얻으려 하고, 제사장들마저 자릿세나 세금, 커미션을 통한 수익에 혈안이 된 모습이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있다는 말 그대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가? 혹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있는 건 아닌가? 탐욕이 본질을 파괴하고 있다. 이미 건물이 교회의 목표가 된 교회가 많다. 영혼 구원의 결과가 성장인데, 어느새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성장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잊지 말라.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배 안으로 그 물이 침투하지 않으면 배는 안전하지만 물이 침투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은 우리 영혼을 성전이라 했다(고전3:16). 테레사 수녀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혼의 궁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다. 그런데 기도 소리보다 소나 양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재물에 대한 염려와 이루지 못한 욕망의 한숨 소리만 가득하다. 찬양 대신 불평과 원망, 사랑의 말 대신 비방과 분노의 말, 이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님은 채찍 들고 내쫓고 싶은 심정이셨을 것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장사치의 소굴이 된 성전을 보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 예수님,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채찍을 휘두르셨다. ‘내쫓으시고...쏟으시며...엎으시고’, 격렬한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예수님은 양이나 소 등 짐승들을 단호하게 밖으로 몰아내고(throw out), 환전상들의 돈을 바닥에 쏟고(scatter), 돈 바꾸는 상(table)을 뒤엎으셨다. 동전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을 거다. 격한 분노의 발산,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을 거다.
주님의 이 폭력적 행동의 이유에 대해 성경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설명했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가장 거룩하고 순결한 곳이 되어야 하는데 장사치의 소굴이 된 것을 참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혹시 화를 꾹 참거나 온순한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오해하고 있나? 17절의 ‘열심’의 헬라어는 ‘젤로스’(ζῆλος), 이 단어에서 ‘열심당’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멀리는 민수기의 비느하스의 열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 중 하나와 미디안 여인이 바알 우상을 섬긴 후 의식의 하나로 섹스를 하자 제사장 비느하스가 의분이 나서 창으로 두 남녀를 한꺼번에 찔러 죽였다. 그러자 하나님이 심판을 그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25:11). 여기 ‘질투’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젤로오’(ζηλοω)다.
의인의 분노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노일 수 있다. 왜 누가 대신 화를 내주면 화가 좀 풀리지 않던가? 하나님도 그러셨던 모양이다. 화가 좀 풀리신다. 때로는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세상이 불의로 기울어질 때 분노하는 사람, 그들의 ‘거룩한 분노’에 의하여 정의는 굳건해진다. 그러면서 사회가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주목받았던 프랑스의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이 쓴 『분노하라』(INDIGNEZ VOUS!)라는 책이 있었다. 94세의 노인 에셀이 쓴 34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인데 프랑스에서 출간된 지 7개월 만에 200만 부를 돌파했었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요즘 세대를 향하여 분노할 것을 명령한다. 레지스탕스란 말 자체가 ‘저항하다’라는 의미인데 저항의 기본 동기가 바로 분노, 에셀은 언론 매체가 부자(富者)들에게 장악된 사회에 분노하라고 말한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 적은 없었다며 이런 사회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 사회를 향하여 분노하라는 것이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 전파하라.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 정치계, 경제계, 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알아야 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리지 말라”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며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폭력으로 투쟁하자는 선동은 아니다. 에셀은 합법적이며 평화적인 봉기를 제시했다.
우리 주변에서 부당하다고 느낄 때 한숨만 쉬지 말고 의견을 표출하고 부당한 것에 적절하게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답게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분노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의 소란을 기득권 세력은 폭력의 틀로 덧씌우려 하지만 그건 폭력도 아니다. 예수님의 소란은 성전 청결, 이방인의 뜰에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것, 혁명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은 구약에서부터 오는 선지자적 시위, 상징적 데모였다.
그래서 분노의 정당성을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열심당도 그렇고 현대의 근본주의자들, 극단적으로는 탈레반이 자신들의 분노와 폭력성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분노의 근원에 ‘주님’이 있어야 한다. 분노의 동기가 이념이나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사랑이고, 생명이시다. 주님의 정의는 욕망이나 이해를 벗어난 순수한 정의다. 하나님의 생명 사랑, 이게 분노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주님의 분노는 십자가로 나타났다. 십자가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 사랑하는 사람을 차마 죽일 수 없어 당신을 스스로 죽이신 사랑이다. 불의에 대해 잠잠하지 않으시되 사랑의 행동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신 주님, 그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를 불의에서 벗어나게 했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이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