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4) 첫 표적,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2:1-11
이희우 목사

영국의 대문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옥스퍼드 대학 시절 종교학 시험 문제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종교학적으로 해석하라’였다. 학생들이 열심히 답안을 써 내려가고 종료 시간이 임박하면서 학생들이 다 답안을 제출하고 나가는데 베이컨은 두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답안지는 백지상태, 시험관이 답안지 제출을 독촉하자 그제야 베이컨이 펜을 들고 딱 한 문장을 답안지에 적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다’, 창조주 예수님을 만나니 맹물이 달콤한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이다. 맹물 같은 우리 삶이 예수님을 만나 달콤한 포도주처럼 맛있는 삶으로 바뀌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표적(sign-act)

성경은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를 바꾸신 것을 ‘표적’이라 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σημεῖον), 기적과는 다르다. 기적은 그 자체가 중요하지만 표적은 기적을 통해 주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기 위한 표적, 예수님은 기적으로 표적을 보이셨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크게 일곱(7acts), 죄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 요한은 일부러 기적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셨던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라는 말씀을 반영했을까? 기적만 찾는 신앙은 반쪽 신앙, 요한은 독자들이 기적 신앙에 매몰되지 않기를 원했다. 결론적으로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구원에 이르는 진짜 믿음이 아니다. 그저 출발점 정도, 표적 신앙 수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23-24절). 아직은 아니라는 뜻이다.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난 후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로 가셨다. 나사렛을 거쳐 가나로 가신 것, 결혼식이 있었는데 주경학자 W. 바클레이는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세히 또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을 근거로 사도 요한의 결혼식으로 추정했지만 당시 신랑집에서 결혼식을 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습으로 보면 요한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가나사람 나다나엘(21:2)의 친척일 가능성이 있다.

결혼식은 인생에서 가장 큰 잔치, 원래 성경의 잔치는 종말의 메시아 왕국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그림으로 많이 쓰였다. 그런데 그 흥겨운 잔치 중의 잔치인 결혼식에 그만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다. 유대인 잔치에서 포도주는 생명과 같은 것, 양고기를 먹기 때문에 꼭 있어야 하는데 결혼식의 생명력이 고갈된 것이다. 앙꼬 없는 찐빵, 김빠진 콜라 격, 양가의 결례이자 비난을 면키 어려운, 심하면 고소당할 수 있는 상황, 문제가 생겼다. 한 주 이상 치르는 축제인데 큰일이다. 흥(興)이 다 깨지게 생겼다. 준비 부족이나 성의 부족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잔뜩 데리고 온, 너무 많은 불청객이 왕창 퍼마셔서 동이 났을까? 낭패다.

그런데 이게 바로 인간의 실존(實存)이다. 우리들의 현주소, 우리는 늘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다. 결핍, 욕구불만, 불평, 슬픔, 이런 것들이 갈등의 원인이다. 잔칫집에서 느끼는 풍성함, 배부름, 만족, 기쁨이라는 구원의 실재와는 거리가 먼 상황, 그런데 예수님 어머님은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체하지 않고 문제를 예수께로 가져왔다. “포도주가 없다”, 단순 상황보고가 아니다. 비난도 수군거림도 아니다. 번지수를 잘 찾은 것, 예수님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본문을 보고 예수께 직접 아뢰는 것은 어렵지만 마리아를 통한 청탁이면 예수님이 거부할 수 없지 않겠느냐면서 마리아에게 기도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기도의 대상 아니다. 여기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맞지만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예수님의 어머니로 표현하지 않았다. 십자가상에서의 요한을 마리아의 아들로 입양하는 듯한 그 유명한 장면에서도 마리아의 이름은 없다(19:25-27).

본문 4절에서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도 손님이니까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퉁명스럽다. 이 ‘여자여(귀나이, ‘Gunai')’라는 호칭 때문에 많은 논쟁도 있었다. 건방진 것 같은 호칭, 그러나 당시 중동지방에서의 언어문화였고, 존칭어를 쓰신 거다. ‘이 여자가 어디다 대고’가 아니다. 영어로는 “Dear woman”, “lady”(귀부인), 조소나 힐책이 아닌 경어(敬語)이지만 어머니라고 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어머니의 아들로 살지 않겠다는 의미다. ‘나를 어머니의 아들로 콘트롤하지 말라’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보다는 요한이 마리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과 ‘여자’라는 호칭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에도 ‘여자’가 등장한다. 예수님을 뜻하는 아이를 낳는 자가 여자로 불린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계12:1),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계12:5). 이 여자는 사탄으로 상징되는 용에게서 박해를 받아 광야로 피신한다(계12:13-14). 이 여자가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에서 예수님께 간청하는 자는 바로 마리아로 상징되는 교회, 그래서일까? 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의 이름을 익명 처리한다. 신비의 관계로 교회를 끌어들인 것,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는 말도 교회를 향한 말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하인들이 아니라 교회일 것이다.

어머니의 말에 예수님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라고 말씀하신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나와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때가 있는데 지금은 기적을 행하여 영광을 보일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결국은 기적을 행하신다. 이게 중요하다. 어머니의 간구가 그때를 앞당겼다. 그래서 기도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계획이 있다고 믿지만 하나님만 아시고 우리는 잘 모르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좀 막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좌충우돌하다 보면 하나님의 때와 계획이 어렴풋이 보이지 않던가? 행동하는 자가 보고, 행동하는 자가 알게 된다. 행하는 자가 진정 믿음이 있는 자다.

새 시대가 도래(到來)하다

마침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6절). 정결 예식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 두세 통 드는 항아리는 한 항아리가 18-24갤론 정도니까 여섯 개면 대략 120갤론, 그렇다면 500L 정도된다(1갤론이 3.8L). 750ml가 포도주 한 병이니 660병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이다. 이 양이 너무 많아서 돌 항아리 물 전체가 아니라 그중에서 떠다 준 물만 포도주로 변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쪼잔하다. 돌 항아리에 가득 찬 물마다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본다.

예수님은 아귀까지 채우라고 하셨고(7절)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다. 그 결과가 많은 포도주를 얻은 거다. 어떤 사람이 공항 세관을 통과하는데 ‘트렁크를 열어주십시오.’해서 열었는데 물병이 꽉 찼다. “이게 뭡니까?” “성지에서 가져온 성수입니다” “그래요?” 세관원이 그것을 열어 손가락으로 맛을 보더니 “성수 좋아하시네, 이건 술이네요?” 그랬더니 “아! 또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하더란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 예수님은 영웅이 되시고, 문제가 축복이 되었다. 문제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있고 없고보다 잘 푸는 게 중요하다. 잘 풀면 문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낳는 산파가 되니까... 기억하라. 기적은 하나님이 행하시지만 기적의 크기는 인간의 순종이 결정한다.

엘리사 때도 그랬다. 기름 한 병밖에 남지 않은 가난한 과부 여인에게 내렸던 명령은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였다(왕하 4:3-4). 엘리사의 말대로 기름을 부으니 방안의 모든 그릇이 기름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준비한 만큼 기적을 본 셈이다.

하인들이 아귀까지 채운 모든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다. 미리 마리아가 언질했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 이게 믿음이다.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은 기적의 절정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의 믿음은 순종이다. 순종이 기적을 불러왔다. 하인들은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했다. 아귀까지 채우는 건 해도 하객들에게 맹물을 들고 가는 것은 따귀 맞을 짓, 하지만 못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분명히 자기들 손으로 맹물을 채운 항아리지만 들고 나간다. 이게 진짜 순종이다. 믿음의 크기는 그릇의 크기, 끝까지 순종해야 기적을 본다.

돌 항아리도 그 안에 담긴 물도 유대교를 상징한다. 정결용이라는 말과 6이라는 숫자가 이를 잘 보여준다. 완전수인 일곱보다 하나가 모자란 인간의 수다. 유대교가 종교를 대표하는데 물과 같이 무미건조할 뿐, 포도주 떨어진 파장난 잔칫집과 같다. 종교가 주는 구원의 힘과 기쁨이 사라졌다. 죽은 종교다. 이 모습은 2장 후반부의 성전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장사치의 소굴이 되었다. 유대교의 한계는 3장의 니고데모에게서도 나타난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선생이지만 하나님 나라(KOG)에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모른다.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도 확신이 없다. 4장은 혼합종교인 사마리아 종교의 실패를 보여준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오에 우물가로 나온 권태로운 인생이다. 종교가 아무런 영향력이나 도움을 주지 못한 여인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다. 살아 있고, 기쁨이 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난리났다.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품질과 맛이 오죽했겠나? 잔치의 기쁨이 살아나고 사람들은 흥이 넘친다. 호스트도 사람들도 다 “이게 무슨 일인고?” 그런다. 성경은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라고 했다. 이게 기독교다. 예수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2:19)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마치 혼인잔치와 같은 것, 새 시대가 도래했다. 예수님이 영웅이시다. 그 영웅 예수님이 영원한 잔치를 즐기도록 교회와 함께 하신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가 포인트, 우리는 장례식장에서도 노래하며 찬송한다. 죽음을 넘어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기에 두려움이 없다.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 정서는 기쁨, 예수 믿는 순간 즉각 주어진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우리의 표정은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머금은 웃는 모습이어야 한다. 설교학의 대가 루돌프 보렌(Rudolf Bohren)은 ‘설교의 제1목표는 기쁨’이라 하였다. 설교는 흥이 있어야 한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잔치에서 흥이 난 것처럼 떠들썩한 예배여야 한다.

성만찬도 구원의 축제다.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이 되면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중세의 성만찬은 마치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를 재연하는 것과 같은 의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전의 성만찬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나눌 메시아 잔치의 재연 같았다. 사람들은 먹을 때 기분이 좋고 행복한 것, 성만찬은 행복한 잔치가 되어야 한다.

흥이 살아나야 할 교회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모습이 당시의 맥빠진 유대교의 모습이다. 문제는 요한이 복음서를 쓸 때 예수님 승천하신 지 60년 정도 지나면서 기독교도 기쁨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유대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를까? 흥이 깨진 예배,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이어가는 상황에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이런 말을 헸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버렸다”

교회 안에서 차별과 저주의 말이 들린다. 세상 이념의 소리가 가득하다. 경쟁과 분열이 있다. 생명의 말씀보다 율법과 죽음의 말이 가득하다. 교회 안팎에서 교회는 포도주가 바닥났고, 더 이상 줄 포도주가 없다고 비판한다. 마리아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냥 똑똑하면 안 되고 지혜로워야 한다.

하루는 엄마 쥐와 새끼 쥐가 함께 가고 있던 중에 고양이가 나타났다. 새끼 쥐가 무서워서 엄마 쥐 뒤로 숨었다. 엄마 쥐가 고양이 앞에 가서 “멍멍”하고 짖었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다. 새끼 쥐가 놀라서 엄마 쥐에게 물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고양이가 어떻게 도망갔어요?” 엄마 쥐가 대답했다. “얘야, 요즘 시대에 제 2외국어는 필수란다.”

교회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교회는 진리의 보루 이전에, 최전선의 돌격부대 이전에 ‘잔칫집’이다. 화약 연기가 나는 곳이 아니라 영웅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맛있는 포도주의 향내가 가득한 곳이다. 기쁨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이적을 가나 혼인잔칫집에서 행하셨다. 물을 포도주 되게 하신 것처럼 물과 같은 우리 인생을 맛나게, 풍미있게 만드실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 찬송,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의 검은 옷이 아니라 밝고 환한 옷을 입어야 한다. 한숨과 후회가 아니라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호흡이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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