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신자가 성장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신앙이란 어떤 지점과 수준에서 정체되어서는 안 되고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신앙이 ‘믿음의 씨’로 심어진다는 교훈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벌써 믿음은 성장한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정체된 경우들이 왕왕 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 서신을 받는 신자들의 상태가 어린아이의 상태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젖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장을 사람의 성장에 비교해서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황영철 – 순례자의 계단 1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겠다는 비전 캐스팅을 셀프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셔도, 자기 인생의 계획이 설정된 사람은 그 계획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우리가 인생 계획을 정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이 마치 스패어타이어처럼 쓰임받은 일 같다. 사람의 능력을 보고, 누구는 이런 능력이 있으니까 여기에 쓰고, 누구는 저런 능력이 있으니까 저기에 쓰고 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네팔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감동과 간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종으로서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런 삶을 엇비슷하게나마 살아본 사람으로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예수의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종이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진실로 – 청춘을 드려 천국을 산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고린도인들도 거룩한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이야말로 집사, 권사, 장로, 목사, 감리사, 감독 등등 교회 안의 온갖 직능의 이름에 앞서는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이름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도라는 이름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게 간직해야 할 ‘은총과 구원의 이름’이고, 그 밖의 모든 ‘직능의 이름’은 이 성도라는 이름에서 파생하는(derivative) 이차적인 이름이고, 때때로 위험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바울 역시 예수님의 정신 그대로 신자와 비신자의 결합으로 “신자가 불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자 때문에 비신자가 거룩해진다”고 믿습니다. 신자와 비신자의 결혼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비신자의 불결함’보다 ‘신자의 정결함’이 훨씬 더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반대였더라면 진작에 그런 가정은 깨지고 말았겠지요! 이것은 성관계를 거부하는 금욕주의자들이 비신자 배우자와 동침할 경우 불결해진다는 염려로 그리한다면, 바울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비신자와의 부부관계로 불결해지기는커녕 신자의 거룩성 때문에 비신자 배우자도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흥규 –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