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 바빌로니아의 유적에서 보여질 것 같은 거대한 기둥 사이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천상의 세계가 벽화로 옮겨졌다.
화려한 구성 속, 신비로운 빛이 비추며 조금은 미지의 세계의 낯선 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 가운데 배치된 구약적 상징들의 등장에 조금은 그 의미가 궁금해진다.
1000호 작품, 일반적 미술 전시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 크기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변영혜 작가는 그렇게 큰 덩치를 하고 있지 않다.
천사가 바로 강림할 듯한 신비로움과 함께 ‘야훼’ 하나님의 장엄함도 느낄 수 있는, 그녀의 전시회는 서울 동안교회의 로뎀갤러리에서 열렸다. 아래는 변 작가와 일문일답.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A. 대한신학대학교대학원에서 기독교 성화를 강의하는 변영혜 작가이다. 화단에서 동양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성경 말씀과 복음의 메시지를 그림에 담아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화작가이기도 하다. 저는 현재 광림교회에서 미술인선교회의 회장으로 섬기고 있는 변영혜 권사이기도 하다.
Q.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A. 대학교 3학년 말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인생과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성경 속 하나님까지 생각이 미치게 됐다. 그래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게 됐다. 대학원 졸업을 하고 미국을 가게 됐다. 그때까지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 주제는 ‘인간의 고뇌’ 같은 무거운 주제를 주로 많이 그렸다. 미국에 가서는 보석 디자인을 했다. 뉴욕 맨해튼의 보석 회사에서 디자이너로서 화려한 보석과 부를 추구하는 작업을 하게 됐다. 미국에서 잠깐 한국에 나왔다가 기도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곳에서 성령세례를 받았다.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내가 너무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나님과 복음을 전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생 때 교회를 처음 나간지 사흘만에, 잠을 자다 꿈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됐다. 그렇지만 그때는 내 인생관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 내 삶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1987년에 보석디자인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기독 미술을 시작한 것이 1990년이다. 그 후로 기독교 미술을 한지가 34년 정도 됐다.
세상에는 유명한 작가나 멋있는 그림은 많다, 그런 그림들이 멋있게 보기도 하지만 성경적인 메시지가 없으면 나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더라. 그런 의욕도 없고, 생각이 없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는 성경적인 깨달음이 있을 때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어떤 기법이나 그림의 장르같은 것도 특정 성령의 메시지가 있을 때마다 그 주제에 맞게 변화된다. 그래서 나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어떤 때는 판화로 하기도 하고, 서양화로 하기도 한다. 때로는 전통적인 동양화로 그리기도 한다. 그래서 개인전을 하는 과정에서 그림에 변천사가 좀 있다. 그래서 주제에 따라 작품이 판이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Q. 천상의 것들을 표현하게 된 계기는?
A. 성경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으려고 하니 구약을 많이 참고하게 됐다. 작가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까’를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떠올랐다. 구약에서 언약궤는 지성소에 있고, 대제사장이 1년에 1번 들어가는 곳에 있다. 내 마음 속에, 그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작품의 주된 소재가 언약궤, 분향단, 순금 등잔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삼층천과 연관해서 구상을 하게 됐다. 벧엘이나 엘림 같은 것들은 성경적, 영적 이야기나 메시지를 담았다.
Q. 영감을 주로 어떻게 얻으시는지?
A. 구상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연상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떤 경우에는 꿈을 꿀 때도 있다. 그러면 꿈을 나름대로 형상화시켜서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내가 이런 그림을 전시회에서 전시를 하다가, 관람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간증으로 피드백을 주기도 한다.
한 예로,어떤 나의 한 그림을 보고 한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11장 19절을 그렸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 그 성경 구절을 찾아봤다. 하늘의 언약궤, 번개와 우레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이 내 그림에 다 등장한다. 나는 사실 그것들을 거기다 왜 그렸는지 모르고 그렸다. 나는 이전에 그런 성경적 메시지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렸는데, 내가 그린 그림의 성경적 메시지를 관람객들이 내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Q. 벽화를 그리시게 된 계기는?
A. 내가 한국화를 주로 하다 보니, 야긴과 보아스의 돌기둥이나, 광야와 같은 거친 바위와 가시덤불을 표현하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벽화의 돌 같은 질감에서 소재가 표현기법과 잘 어울리게 됐다. 그래서 자꾸 하게 됐다. 한국화의 한지의 표현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내 작품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를 담아내고 싶다 보니, 그 광대하심과 무한성을 표현하기에 작품이 점점 커지게 됐다. 크기가 크니 내가 원하는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Q. 벽화작업은 좀 어떠신가?
A.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노동이 따른다. 일반 화실에서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알루미늄판 위에서 돌가루, 화산재 가루, 황토가루를 반죽해서 판 위에 황토벽을 만들고, 이것이 마르면 몰타르로 회벽을 만든다. 그 판 위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그 무게가 엄청 무겁다. 이것을 들어서 옮기거나 하는데 굉징히 힘들다. 이번 대형 작업의 도구는 강원도 봉평에 있어서 봉평까지 오가면서 제작을 했다. 지금 전시하고 있는 큰 벽화는 일반 화실에서 감당이 안 된다. 재료들도 다루기도 어렵고, 큰 작품을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회벽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을 자르려면 기계와 기술도 필요하다.
Q. 이번 작업 가운데 인상 깊은 것은?
A. 아까 말했듯이 그림을 그리면 주로 구약에서 소재를 찾는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내가 이스라엘을 많이 방문한 줄 아신다. 그런데 사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다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런데 내 그림을 보는 관람객 중에 이스라엘을 갔다 오신 분들이, 이스라엘에서 보고 온 것과 똑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이스라엘을 가려고 준비했었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가지 못했다. 그래서 코로나 기간에 한 그룹과 줌(Zoom)으로 성지순례에 관한 강의를 듣다가 나중에 그 팀과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경로를 따라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을 다녀왔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풍토, 바람, 자연환경을 몸소 체험하고 싶었다. 예수님께서 당시 걸으셨던 길을 걸어보며, 절절히 몸으로 체험해서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됐다.
Q. 학교에서 기독교 미술을 가르치신다.
A. 일반적으로 크리스천들이 교회에서 예배음악으로 음악은 굉장히 친숙하다. 그런데 미술은 예배와 연관된 것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보통 교인들이 기독교 미술에 대해 많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보통 ‘성화’이러면 좀 틀에 밖힌 그림들이 많은 것 같다. 종교적인 주제나 소재가 굉장히 피상적인 수준에서 표현됐다. 상투적인 표현 속에 창의성은 실종됐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내 그림은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반(半)추상적이다. 나는 그림이 예술로서 사람들의 마음들을 울릴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 보니 기존의 틀을 벗어나, 주제에 맞는 표현을 위해 기법의 틀을 깨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기독교 미술은 좀 일반 미술에 비해 평가절하되는 측면이 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은 믿는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일반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에 누구나 기독교 미술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적인 통로가 됐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아직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종교화들 속에 하나님의 영적인 메시지가 표면적인 묘사에 그치거나, 그 이면에 있는 영적인 깊이를 창의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영감있고 울림이 있어서, 관객들이 굳이 말이 필요 없이 그림 앞에 서면 영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그림은 작가가 재주나 능력이 많다고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영성’이 같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것이 세상적인 그림과는 구별되는 ‘성화’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십자가나 예수님의 얼굴이나 교회를 그려야만 성화가 아니다. 그 이면에 ‘영성’이 결핍되면 안 된다. 결국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것은 기교로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기독교 미술을 강의하다보면, 역사 속에서 문화가 얼마나 그 시대에 영향력을 주는 건지 깊이 깨닫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사단이 문화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미학을 완전히 뒤엎는 사악한 미술이나 음악이 많다. 이런 문화의 혼돈 시대에 깨어있는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맑고 하나님의 선한 아름다움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한다. 기독 작가라면 시대의 기조에 자신도 편승해서, 알지도 못하는 추상의 이미지를 ‘현대 미술’이라는 미명 하에 작품의 명제만 그럴듯하게 쓰고 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성뿐만 아니라 적절한 기술과 재능도 잘 받쳐줘야 멀리, 그리고 높이 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현대 기독 미술가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충분한 연구와 연습이 뒷받쳐줘야 한다.
Q. 꿈에서 예수님 얼굴을 보셨다고 한다.
A. 꿈에서 나는 황무지 위에 죽어서 누워있었다. 멀리서 누군가 나에게 걸어왔다. 그런데 꿈 속에서 내가 그를 바라보면서 ‘정말 너무나도 착하고 순전하다’라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분은 그냥 ‘사랑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예수님의 머리칼이 흑갈색인데 어깨까지 내려왔다. 자루 같은 헐렁한 옷이 발목까지 닿았다. 그 꿈은 예수님의 옷에 올이 풀린 것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 생생했는데, 그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죄로 인해 숨고 싶고 피하고 싶어서, 통회 자복하며 엄청 울면서 회개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게 다가오시면 오실수록 예수님 곁에만 있고 싶었다. 예수님은 너무나 따뜻하고 감미로운 사랑이셨다. 그분을 만나니 숨고 싶기도 하고 옆에 딱 붙어 있고 싶기도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예수님은 나의 참 좋은 친구’라는 찬송가의 표현이 있지 않은가?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눈높이에 맞춰 바라봐주시고 이해해주시며 품어주셨다. 그 어떤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었다. 예수님이 나를 들어 올려서 목마를 태우셨다. 그러자 죽은 내가 살아났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님의 어깨 위에서 만세를 부르며 너무 기뻐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소리쳤다.
다른 한 꿈에서는, 공명정대한 ‘심판의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 예수님의 눈과 목소리에서 엄위함을 느꼈다. 이것을 구름이란 소재로 예수님을 표현한 '실존'이란 작품이 있다.
마지막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봤다. 십자가가 90도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30도 정도가 기울어져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롱대롱 매달려 계셨다. 기울어진 십자가에서 체중의 무게로 오는 압박의 통증을 견디시는 모습이었다. 십자가가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처참했다.
Q. 앞으로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A.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 오면 보통 사진으로 기억을 남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이스라엘 도성의 경험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봤던 경관에서 느낀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 같은 것을 그리고 싶다. 또 엘리야가 쉬었던 로뎀나무가 나는 굉장히 풍성하고 큰 줄 알았는데, 실제 가보니, 작고 빈약하고 엉성한 나무였다. 이런 것들을 좀 표현하고 싶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으로서의 성지가 아니라 실제 성경 배경을 좀 표현하고 싶었다.
또, 한가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모습이 여호와의 7대 절기 안에 다 들어있다. 초막절, 유월절, 나팔절 그림 같은 것들을 그려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신약과 구약이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의 맥 속에서 한 화면에 담아 그리고 싶다. 그래서 처음 만든 작품이 오순절 작품이다. 앞으로 이런 것들을 위해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래는 변영혜 작가의 대표작들.
작가노트: <영생의 빛-쉐키나>
“구름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의 빛이 성소를 지나 지성소 안으로 충만하게 깊이 들어오는 모습으로 중첩된 성전의 이미지를 통해 깊이감을 더하고, 그 쉐키나의 영광이 지상을 은혜의 꽃으로 피우며 하늘문이 열리는 형상을 회벽 위에서 벽화로 표현하였습니다.”
작가노트: <영생의 빛-언약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2)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내 마음 속의 지성소를 생각하며 그린 작품으로, 이 언약궤의 작품이 걸리는 곳에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영광이 임하시길 기도하며 제작하였습니다.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법궤, 증거궤) 속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는데 두 돌판은 ‘말씀’이신 예수님, 만나 항아리는 ‘하늘의 참 양식’이신 예수님,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는 뚜껑인 속죄소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몸으로 덮어 주시는 크신 은혜가 있고 그 속죄소 위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의 언약궤가 성전 안과 내 심령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됨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작가노트: <분향단-Pray>
“성소 안에는 순금등잔대와 분향단과 떡상이 있습니다. 그 중에 분향단은 휘장 넘어 지성소의 언약궤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성도들의 기도로 기도의 향이 올라갈 때, 천사들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기도의 향을 금대접에 담아 하나님 보좌 앞 하늘의 금향단으로 올려가는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라오는 성도들의 기도의 향을 흠향하시며 열납하시어 기도의 응답을 내려주시는 은혜의 모습입니다. 성소의 분향단의 향이 끊임없이 계속 피어오르듯 우리도 항상 기도를 쉬지 않으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예배의 자리, 기도의 모습을 상징화하였습니다.”
작가노트: < Burning Bush-하나님의 임재>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43:2)
“이 벽화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가 [Burning Bush] 작품 속에 있습니다. 아치형 중앙에는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이루는 나뭇가지가 있고 그 안에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셨던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의 불꽃이 있습니다”
“가시면류관 모양의 떨기나무 가지들에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초를 당하신 예수님 얼굴의 형상이 나타나는 듯하며, 양쪽 기둥 옆의 두 날개는 하나님의 펴신 팔, 크신 날개로서 암탉이 그 새끼를 품듯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독수리의 두 날개로 우리를 업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날개 아래의 큰 선묘의 흐름은 성령의 바람을 뜻합니다. 양쪽 하단의 불붙은 가시 떨기나무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불같은 시험과 고난을 이기며 통과하는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 속 고난의 여정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큰 팔로 감싸 안아 위로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며, 이사야 43장 2절 말씀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이 벽화의 제작기법은 알루미늄판에 돌가루, 화산재 가루, 황토가루를 반죽하여 발라서 황토벽을 만든 후에 그위에 모르타르를 발라 회벽이 된 상태에서 프레스코그라피 기법으로 이미지가 들어가고 안료로 칠하면서 순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임재의 불꽃이 있는 부분에 금박 처리를 하였습니다. 회벽의 돌같은 표면에서는 조각도로 파내고 긁어가며 요철과 함깨 돌의 질감을 극대화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