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만 이름이 나오는 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데 누구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갈릴리 가나 사람인 것은 분명하고(21:2), 빌립과 가까웠던 것 같다.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제자 명단에 항상 빌립 다음에 등장하는 바돌로매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참고로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가나에 ‘나다나엘 바돌로매 기념교회’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바돌로매일 가능성이 높다.
나다나엘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한 빌립이 찾아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시더라”라는 말을 듣지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나사렛 같은 동네에서 메시아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점진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그의 반응 세 마디에 집중해 본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메시아가 나올 동네가 아니라는 46절의 이 반응은 한 마디로 편견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힌 사람의 반응이다. 나사렛, 사실 그런 선입관이 생길 만한 동네였다. 갈릴리에 속한 손꼽히는 시골, 팔레스틴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다. 원래 북왕국의 영토였던 갈릴리는 앗수르에게 망한 후 오랜 세월 이방인들이 거하면서 이상한 동네가 되고 말았다. 혼합 인종이 많아진 것이다. 기원전 100년경에 유다에 편입되었어도 ‘이방의 갈릴리’라 불릴 정도로 정통 유대 땅이라고 볼 수는 없는 동네였다. 지주들은 주로 예루살렘이나 타지역에 거하는 사람들, 사회경제적 갈등도 심했다. 농민 반란이나 열심당 운동이 자주 일어났고, ‘갈릴리 유다’의 폭동도 있었다. 주민들은 무식하고 성격이 괴팍하며 추잡하고 저급한 풍속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니 갈릴리는 이방의 땅, 착취의 땅, 반란의 땅, 나사렛도 갈릴리에 속했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빌립도 나다나엘도 이 갈릴리 출신이다. 빌립은 갈릴리 북쪽 벳새다 사람이고,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요21:2), 그러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 말은 메시아와는 너무 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는 자조적인 말, “우리는 안 돼!” 그런 의미도 담겨 있다. 패배주의 의식이랄까? 과거에 우리도 한국 사람을 ‘냄비근성’이라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지속적이지 못하고 쉽게 끓고 빨리 식는다는 것, 그래서 생긴 게 ‘빨리빨리’다. 이건 아직도 여전한 우리 민족의 특징이다. 그런데 사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빨리빨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가 와도 뛰지 않았다. 너무 점잖은 게 오히려 탈이었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치고, 척박한 가운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빨리빨리’로 바뀐 것, 환경에 적응한 셈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메시야가 갈릴리 나사렛에 오시면서 갈릴리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편견에 사로잡힌 것, 그래서 빛을 보지 못한다. 편견은 진리를 발견하거나 생명을 얻는 것에 가장 큰 적, 심하면 집착이 될 수 있고, 강하면 아집이 된다. 요한복음에서 지적하는 가장 큰 적이 바로 이 편견이다. 요한복음은 이 편견을 깨기 위해 ‘오해 테크닉’이라는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시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생기면 예수님이 길게 설명해주시는 구조, 이게 요한복음의 기본구조다.
그래서 물질적인 빵에만 집착하지 말고 영적인 빵을 먹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찾았어야 했다. 니고데모는 육체성에 갇혀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냐고 마치 초딩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거듭난다’는 말인 헬라어 ‘아노센’(ἅνωθεν)은 ‘다시’(again)라는 뜻도 있지만 ‘위로부터’(born from above)라는 뜻, 위로부터 나는 것, 즉 성령으로 나는 것인데 ‘다시’로만 이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모를 안다며,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요7;52)는 한계에 갇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표현을 했는데 이 말은 무엇보다 이런 완고한 편견, 자기라는 아집이 죽었다는 뜻이다. 이 편견, 아집이 죽어야 진정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 내 항아리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없지 않나? 색안경을 끼고는 결코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 말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로 받고 싶다. 또 비방하지 말라는 말로도 받고 싶다. 인터넷이나 SNS의 글들을 보면 독설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에서는 왜 못 나오냐?” 설득하려 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했다. 살아있는 메시아를 만난 자신감, 이게 중요하다. 편견을 깨는 방법으로는 이게 최고다. 안드레와 요한, 베드로, 빌립이 이미 모든 편견을 깨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다. 소문이나 말보다는 성령의 텃치가 중요하다. 직접 체험하면 달라진다. 코로나 이후 아직도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온라인은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동작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반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대면의 영이시다. 우리 안에 임하셔서 2천 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에 경험하게 하시는 영,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와서 보라”고 초청하신다. 편견은 버리고, 생명의 초대에 마음을 열고 참여하여 풍성한 빵과 영원한 생수를 먹고 마셔야 한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48절의 이 반응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나다나엘의 반응이다. 이 말씀을 보면 가짜 이스라엘인이 있고, 진짜 이스라엘인이 있다. 진짜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행하는 사람, 이스라엘의 영광을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다. 반면에 말로만 “이스라엘, 이스라엘”하는 사람, 민족을 위한 희생은 없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이익만 취하거나 자기 명예만 높이는 사람, 세상 논리와 이해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과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진짜가 아니다.
나다나엘은 매우 민족적인 사람, 예수님을 만난 다음 했던 신앙고백을 봐도 남다르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왕’이라 했다. 이스라엘에 국한된 예수님으로 오해한 고백이기는 해도 대단한 고백이다. 이스라엘이 간절히 기다리던 바로 그 지도자라는 감격의 고백이다. 예수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다. 당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참조 사36:16, 미가4:4, 스가랴3:10), 실제 지나가다 우연히 보셨을까?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기도하며 묵상하며 공부하는 자리, 그러니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은밀하고도 개인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고 계셨다는 말이다.
‘참 이스라엘 사람’(47절)이라 하신 것도 마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간사하던 야곱이 회개하고 이스라엘로 변화 받은 것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나다나엘의 영적 상태를 칭찬하신 거다. 이렇게 자신을 꿰뚫어 보는 예수님이시기에 나다나엘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마음이 열린다. 예수님을 영접한다.
우리도 나만의 무화과나무가 있어야 한다. 엘리야에게 로뎀나무가 있었듯이,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가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나만의 나무가 필요하다. 이것은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특정 행동이나, 은밀하게 즐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내 영혼의 지성소와 같은 곳이다. 언제 한 번 언급했던 『단테 신곡 강의』(ダンテ 神曲」講義)란 책을 쓴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 友信)를 기억하나? 그는 단테의 『신곡』을 너무 좋아해서 토요일 밤마다 세 시간씩 『신곡』 연구만 했다. 50년을 그랬다. 그 과정에서 많은 노트들이 쌓였는데 이게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70세가 넘은 나이에 『신곡』을 강의하게 되었고 이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 『단테 신곡 강의』라는 책이다. 누구에게든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제대로 반응한 고백이다. 진리,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전자제품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하는데 찰나에 우리는 얼마든지 깊은 만남에 이를 수 있다. 나다나엘이 그랬다. 요한이나 안드레나 베드로나 빌립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예수님을 알게 된 것과 다르다. 더 오래 지켜보며 예수님을 만난 이도 있다. 침례(세례) 요한이 그랬고 예수님의 가족이 그랬다. 요한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만나는 방식은 다양하나 공통적인 한 가지는 만남 후 그들의 신앙고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고백은 사람마다 다양했다.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참 이스라엘 사람답게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했지만 침례(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다(29, 36). 대조적이다. 시몬의 형제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고 고백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의 소망이다. 빌립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45)이라 했다. 자신이 읽은 성경 속에 약속되었던 그분이 오셨다는 고백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자신이 외면했던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라고 고백했다. 그들의 표현으로 타헵(Messiah)을 만났다고 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 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라고 고백했다. 카라바조(Le Caravage)의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라는 그림을 보면 도마는 예수님 허리에 검지 손가락을 푹 집어넣어 확인한다. 현실주의자였다는 뜻이다.
각자 자기 나름의 처지나 방식으로 주님을 만난다. 예수님은 각양각색의 색깔을 가진 모두에게 다 맞는 분, 그래서 자기만의 신앙고백을 하게 했다. 자기 삶의 중심에서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은 우리 삶의 변두리가 아니라 한복판에서 주님이 되기 원하신다. 다른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나의 마음으로 나의 입술로 시인하고 고백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신앙의 마침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도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 창세기의 야곱을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창28:12). 야곱이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가는 길에 두려움과 피곤에 지친 상태에서 잠이 들었을 때 꿈을 꾼다. 이름하여 ‘벧엘에서의 꿈’,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 것인데 유대 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그들의 복음이다. 메시아의 조상이 될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 이 비전이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된다.
예수님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예언된 ‘인자’(the Son of man)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브릿지,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모습,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그 꿈이 메시아에 관한 꿈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내가 그로라” 그러시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자기를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간접적으로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길(the way), 막혔던 하늘의 통로가 열렸다.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이 열렸다. 그동안 하늘은 닫혔고 구름이 가득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요한복음은 여전히 현실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깨우치려는 예수님과의 대화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ἅνωθεν)고 말씀하셨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빌립은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다(요14:8). 그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고 반문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이 열렸는데 빌립은 여전히 보지 못했다. 남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육신의 한계성에 매여 주님이 보여주신 진리를 제대로 못 볼 때가 많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이 열렸다. 주저하거나 땅에 매여 있으면 희미하게 볼 뿐이지만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은 말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생명의 풍성함을 누려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