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전 아닌 평전, 객관적 서술 노력
장기려 삶의 핵심은 기독교 신앙
우리 시대의 사표와도 같은 스승
동양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국민적인 존경을 받은 장기려 박사의 평전이 출간되어, 이를 위한 북토크가 열렸다. 도서출판 ‘꽃자리’가 발간한 장기려 박사의 평전은, 지속적으로 장 박사에 관한 책을 써온 지강유철 작가가 저술했다.
지난 16일 정릉감리교회(담임 한희철 목사)에서 열린 이번 북토크에는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 칼빈대의 강영안 박사, 문학평론가이자 청파교회를 담임하는 김기석 목사 등 여러 패널들이 참여했다.
장기려 박사는 최초로 초기 간암 환자를 대량 간 절제술로 완치시켜 간 수술에 탁월한 역량을 남겼으며,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으로 여겨지는 청십자의료보험을 설계했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등 무수히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부유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평생에 걸쳐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섬기며 살았기에 ‘동양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위인전과 다르게 평전은 다루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시각을 제공한다. 세간에 알려진 공로와 함께 이번 평전에는 장기려 박사의 인간적이고 연약한 모습 또한 공개된다. 평전을 저술한 지강유철 작가는 이번 책에서는 장기려 박사의 ‘창씨 개명’ 문제, ‘부마항쟁’ 때, 장기려 박사가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학생들은 다치지 않았다’라는 서술 기록 부분에 있어서는 장 박사에게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몇 참가자들은 세간에 알려진 몇 장기려 박사의 미담은 후세에 꾸며진 얘기라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북에 놓고 온 아내를 위한 ‘순애보 편지’와 ‘가난한 환자를 위해 치료비를 지불하지 않은 환자에게 병원의 뒷문을 열어주어 도망가게 했다는 미담들’에 대해, 참가자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밝히며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지강유철 작가는 ‘책의 저술 목적’에 대해 “몇 년 전에 있었던 의학 문제라든가 의료 분쟁 같은 것들에 대해 몇 년 전 교계에서 유행했던, 칼 쉘던의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책처럼 ‘장기려 선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장기려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에 우리나라 의학계의 모습은 어땠을까’ 궁금해서 독자들로 역사 속에서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안내하고 싶었다”며 “그러나 장기려 선생을 장기려로 표시하면서 나는 성인 장기려 뿐만 아니라 인간 장기려 또한 다루며 그의 명과 암을 모두 다루려고 했다”고 밝혔다.
김기석 목사는 ‘장기려 박사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 시대의 선생이 있나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70·80년대 우리 세대에는 스승들이 있었다. 엄혹했던 시대에 언제나 바라보면서 ‘저분들은 뭐라고 하실까’하며, 그분들을 바라봤고, 그분들은 그럴 때마다 우리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줬던 사표가 됐다. 장기려 선생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또 분들의 아름다운 삶의 핵심에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고 했다.
이어 “장기려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야나이하라 다다오’(Yanaihara Tadao, 전 동경대 총장)는 일본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적으로 흘러갈 때, 과감하게 ‘일본 제국주의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일본 입장에서는 '민족의 반역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진짜 생명은 외형적인 제국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뜻이 일어난다”고 했다.
김기석 목사는 “장기려 선생에 배울 점으로 아픔과 고통 앞에서 차마 등을 돌릴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우리도 주변에 아픈 사람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이를 돕기 위해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도울 길을 찾아 보다가 못 찾으면 포기한다. 그런데 장기려 선생은 길을 만들어서 그들을 돕는다. 장기려 선생은 길이 막혀 있을 때, 길을 한 걸음 넘어 나갔다”며 “또한, 그의 삶 속에서 보여지는 건강함이라는 것은 ‘그가 했던 일들이 진행되다 변질되면 과감하게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는 “나는 신앙적으로 볼 때, 그릇의 크기를 재는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는 그릇의 외형의 크기가 중요한 기준이겠지만, 신앙으로 보면 ‘자기를 얼마나 비워냈는가’가 그릇의 크기를 재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장기려 선생은 자기를 온전히 비워낸 사람이다. 하나 담으려고 했던 것이 ‘예수’이다. 세상을 떠나기 2달 전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묘비에 ‘예수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부분이 그분이 어떤 분이냐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이어 “예수를 담기 위해 ‘나를 온전히 비워낸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능하다’라는 것에서 그분께 감사한 마음이 크다. 왜 이런 것이 교회 안에서는 불가능했을까. 여전히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부 자유스러운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대)는 장기려 박사의 ‘기독교 이상주의’에 대해 “장기려 교수는 평생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은 결국 기독교 신앙이다. 북한에 놓고 온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기려 교수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내가 선하게 남한에서 행동하면 북한에 놓고 온 가족과 자녀들에게 선하게 갚으시지 않을까’ 하는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작용했다”고 했다.
이어 “그가 언급한 ‘기독교 이상주의’는 ‘추상적 철학’과 ‘신학적 이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제 치하와 북한의 치하에서 경험한 것에 대해, 현실에 대한 ‘책임과 반응’이다. 현실에 자신이 처한 부름에 대해 눈 감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평화 정의 민족분단에 대해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상황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었다”고 했다.
장기려 박사와 생전에 교류가 있었던 참여자들도 이었다.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기독교 역사학자로서 ‘한국 기독교 의료사’를 저술하며 장 박사와 교류했던 이만열 교수는 “내가 고신파 출신임에도 함석헌 학회 초대 회장이었다. 고신파에서 이를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함석헌과 함께 사역을 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선생이 있다. 해방 운동을 하면, 그 운동가에 대한 의례 기념사업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중심이 되어 김교신 기념사업회를 출범하고 4년간 회장을 했다. 장기려 선생은 그런 함석헌 선생과 김교신 선생과 가까이 했고, 그런 맥락에서 나는 장기려 선생과 맞닿는다”라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 TV를 통해 장기려 박사를 보고 의사로서 꿈을 키웠다는 류영준 교수(강릉대 의대)는 장기려 박사에게 배우고 싶어 고신대 의대에 진학했다. 이미 은퇴한 후라 직접 강의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채플에서 “장기려 선생님은 채플을 마치면 일일이 학생들과 악수하고 인사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인간적이 모습의 단면이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하고 신뢰를 잘 지킨 분이다. 기독교 역사를 봐도, 다수 일때는 거의 없었다. 진리를 지키는 것이 목숨을 내어 놓아야 된다는 판단이라는 것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과연 알까 그런 생각이 든다. 교회가 세상과 너무 친해진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장기려 선생의 인생을 좋은 것만 보지 말고, 파란만장한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인간 장기려가 어떻게 살았는지 순간, 순간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판단을 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만나시길 바란다”고 했다.
지강유철 작가는 ‘실질적인 한국의료보험의 정착자로써의 장기려 박사’에 대해 “의료보험은 일찍 정부가 1963년에 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행은 70년대 말까지 못하고 있었다. 장기려 선생은 68년에 민간의료보험을 시작했다. 그전에는 의료보험은 만들어 놨지만,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전 세계적으로 의료보험은 보편적인 서민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초창기에는 한국에 들어와서는 그 사람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특권층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것을 장기려 선생이 보편적 의료보험 개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한국고전번역연구원의 임자헌 연구원은 “지금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유방암으로 인해 태어나서 처음 수술을 받아봤다. 수술실에 들어가면 바로 수술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헤어져 대기실에서 1시간 가량 대기를 하는데 참 두려웠다. 내가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서 누워있는데 시편 3장 4절이 써있었다. 그리고 주치의와 병원의 원목이 찾아와 기도해 주셨다. 나에게는 이것이 크게 위로가 되고 감사했다. 장기려 선생님이 그렇게 환자들에게 따듯함을 주셨던 것 아닐까 생각이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가 불안할 때, 손잡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실 수 있었던 분이다. 그렇기에 약자들을 위해서 심지어 전쟁통에 의료보험의 원안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놀랐다”고 했다.
지강유철 작가는 ‘장기려 박사가 노년에 참여했던 종들의 모임’에 대해 “장기려 선생은 평생 한국교회에 대해서 아픔이 많았다. 일제시대 때, 본인이 다니는 감리교인 신양교회가 완전히 신사참배 앞에 무릎을 완전히 꿇은 것을 확인하고, 교회를 나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북한에서 지냈던 5년 동안, 일제 치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의 평양 산정현교회가 공산 치하에서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며 ‘순교를 할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안에서 교회를 지켜가야 하는가’ 두 패가 서로 다툼을 벌였다. 장기려 선생은 여기서도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 “그리고 남한에 내려와서는 남한 교회가 돈과 연루된 대형 집회 위주의 맘몬을 섬기는 교회에 굴복한 것에 실망했다. 그러다 이름도 없고, 교단도 없고 목사를 키우는 신학교도 없는 조그만한 신앙 공동체를 발견하고, 그곳을 4년 동안 다니며 공동체의 지체들이 진정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를 시험했다. 제도권 교회가 아닌 이름도 없는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돌아가셨다. 장기려 선생의 제자나 장 선생의 유족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노망이 나서 이단에 빠진 것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다. 그 모임이 ‘종들이 모임’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