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신앙생활: 전도란 무엇인가?(4)

오피니언·칼럼
설교
  •   
사도행전 5:12~42
이태희 목사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2:5)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막2:9-11)

예수님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죄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인간과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본질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적하게 만든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고 불결한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어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고 싶어 안달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일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의식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구제불능의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죄의식을 가지고 애통하며 신음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마15; 롬1) 자신의 죄성, 마음의 부패함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영혼의 고뇌에 빠진다.

[부흥을 위한 팁] 여러분의 마음을 잘 살펴보라.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보라. 더러운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 완전한 절망으로 들어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그러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토록 비참한지, 자신의 삶이 왜 이토록 절망적이고 허무한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요,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두 번째 의식이 깨어난다. 나의 힘과 나의 행위로는 이 죄로부터, 이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순간 설교 시간에 들었던 그 복음이, 길거리에서 외치던 전도자의 그 선포가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Amazing Grace.”: 존 뉴튼 (노예 무역상의 회심 사건) “나 같은 죄인 (wretched)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바퀴 벌레. 더러운 오물. 불 구덩이에 던져 버릴. 우리는 그런 존재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5:32)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 곁에 베드로도 없고 바울도 없는데. 생명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무슨 증거로 입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생명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 입증할 수 있는 최고의 증거이자 증인은 바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할 때 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 말씀의 증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전파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강림 하셔서 우리가 전하는 그 증언의 증인이 친히 되어 주신다. 그것이 오순절 사건의 의미였다. 회심이 일어나고, 마음의 찔림과 곤고함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나 복음을 붙잡게 되고. 찬양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고.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 (행5:33-37)

가말리엘은 당시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였다. 사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사도들에게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한 후에 그들의 분노를 억제시키고 과거에 있어떤 두 가지 선례를 들어서 그들에게 주의하도록 충고를 한다.

그는 두 사람의 예를 드는데 그것은 “드다”라는 사람과 갈릴리의 “유다”라는 사람이었다. 드다가 일어나 자기를 특별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사 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그 자신이 죽임을 당하자 그를 좇던 사람들은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의 운동도 다 헛일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 호구 조사 (언제나 사람들을 흥분하게끔 만드는 사건으로, 과세에 의한 로마 통치의 상징이다.)가 시작되자 갈릴리 사람 유다는 몇몇 사람을 꾀어 자신의 지도하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역시 죽었으며, 그를 따르던 모든 무리도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 전부 어떤 사상을 주장했고, 그 사상을 따르는 추종자들도 꽤 많이 확보했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결국 다 흩어져 버렸으며 그의 사상과 활동들도 시들해졌던 역사적 사례를 든다. 그와 같은 사례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행5:38-40)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5:41)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한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다. 그들은 등이 참혹하게 갈기갈기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 물러나왔으나 그러면서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0-1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5:42)

이후 하나님의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계속해서 확산되었다. 바울 사도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 생명의 말씀은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아가야, 구브로를 넘어 로마에까지 확산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은 후 50년이 지난 80년 경 로마 제국 안에 기독교인의 수가 14만명. 기독교인의 수가 놀랍게 증가하자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처형하다. 그러나 2세기에 접어들어 기독교인들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복음은 로마제국의 주요 도로와 강을 따라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복음은 아라비아 페르시아로,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으로 갔다.

콘스탄틴 통치가 시작될 때 로마제국의 전체 기독교인 수가 3-4백만으로 추산될 정도로 복음이 놀랍게 로마제국에 확산. 기독교 공인 (313, 밀라노 칙령), 국교 (380 테살로니카 칙령)

서구 문화와 문명에 성경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됨. 그 과정에서 복음의 변질과 성경적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한 타락의 모습도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결국 종교개혁을 통하여 또 다른 부흥과 영적 각성을 경험한 유럽의 교회는 세계 문명사의 획을 긋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마틴 루터에 대한 보름스 회의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면죄부, 테첼 수도사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라틴어로 95개조 반박문) 마치 천사의 날개를 단 것처럼 몇 주 만에 복사되고 번역되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518년 루터의 체포령이 내려졌고 1520년 6월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가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지 않으면 출교시키겠다고 협박했다. 황제로부터 보름스 회의에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보름스에 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며 루터를 만류한 친구들에게 루터는 “비록 지붕의 기왓장만큼 많은 마귀들이 그곳에 있다 해도 나는 보름스로 가겠다.” 4월16일 보름스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리면 외친 첫 마디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보름스 회의장에는 교회와 국가의 최고의 권력을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4월18일 두번째 회의 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고 루터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천명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내 자신이 설득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서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제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은 통일을 향해 나가고 있다. 복음통일 복음통일 말하는데 복음통일이 무엇인가? 통일의 방법을 의미한다. 통일의 방법이 복음이라는 의미다. 복음으로 통일을 이룬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복음을 통한 영혼의 회심의 역사를 통하여.. 폭박적인 부흥의 역사,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통일을 이룬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을 회복하여 성령의 열매를 밋보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금식.. 기도와 말씀에 전념.. 정말 통일한국, 선교한국의 사명이 있다면. 말로만 통일한국 선교한국 외치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라. (끝)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