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많이 믿는다. 하나님을 더 많이 말이다. 그리고 확실히 앞으로 더 많이 믿을 것이고, 지금도 더 많이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당신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사진이나 포스터를 좋아한다. 하지만 파리 오르세 박물관에서 그림을 실제로 보니 가슴이 벅찼다. 그 색감과 움직임은 정말로 특별했다. 또 나는 랄프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이라는 음반을 즐겨 듣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늘 하나님에 관한 글을 즐겨 읽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하기도 했다. 이 책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팀 체스터 – 하나님을 즐기는 삶
하나님은 쉬셨다. 그저 소진되어서가 아니라 충만한 기쁨 가운데 쉬셨다.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것이 우주를 통틀어 첫 번째 안식이었다. 엿새 동안의 수고의 날숨은 일곱째 날에 이르러 삼위일체 관계 안에서의 사랑, 기쁨, 충만 그리고 만족의 들숨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다(창 1:26-27).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이 된다는 것 안에는 하나님처럼 쉬고 하나님과 함께 쉬며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 안식이 그러했듯 지금 우리의 안식도 사랑이 많으시고 관계적인 하나님과 함께 쉬는 시간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우리 존재를 입증하는 것,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위한 것이다. 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쉼을 갖고 있다면, 무엇을 위해 쉬고 있는가? 우리의 삶은 우리라는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외로운 10초에 불과한가? 우리의 삶은 거짓 신으로 숭배받는 우상을 위한 끊임없는 수고와 불안의 시간인가? 복된 소식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애덤 마브리 – 잘 쉰다는 것
한 남자가 모래가 휘날리는 들판을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천이고, 멸망의 도시에 살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에 무거운 짐을 등에 진(사 64:6; 시 38:4)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죄의 짐이 어깨를 짓눌러 머리끝까지 아팠다.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기도 했다.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행 2:37) 하며 그는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기도 했다. “와! 드디어 무거운 짐이 벗겨졌다!” 크리스천은 너무 기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곤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기에 제가 쉴 수 있게 되었고,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제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은 눈물을 글썽이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때 세 천사가 다가왔다. 첫 번째 천사가 말했다. “평안하세요. 당신의 죄가 사해졌답니다.(막 2:5)” 두 번째 천사가 크리스천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슥 3:4)
존 번연 – 천로역정 주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