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 요한은 죄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어린양이 오셨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것도 개개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질 완벽한 제물로 오셨다. 복음이다. 스스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위해 어린양이 오신 것, 감격한 침례(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다. 자기 확신이라기보다 하나님께부터 온 확신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브릿지(bridge)로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 그 분이 침례(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 앞으로 나오신다. 그때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소개가 “성령 침례(세례)를 베푸는 분”이었다.
왜 침례인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 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복하며 침례를 받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때 요한이 베푼 침례가 기독교 침례의 기원이 된다. 물론 침례(세례) 요한의 침례 이전에도 이 의식은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주는 의식, 침례(세례) 요한의 침례는 이방인들의 침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침례였다. 그는 유대인들을 준비시켜서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한 ‘회개의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해야 깨끗해진다는 문자 그대로의 세례 정도랄까?
세례는 헬라어로 ‘란티스모스’(ραντισμός, 물방울을 떨어뜨림)이고, 침례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 물에 잠김)인데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형식의 차이다. 세례는 물을 머리에 떨어뜨리거나 붓는 형식이지만 침례는 전신을 물에 잠그는 형식이다. 둘째는 의미의 차이다. 세례는 죄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지만 침례는 “죽어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성령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다”는 의미다(골2:12). 셋째는 받는 자의 자격 차이다. 세례는 신앙고백을 한 사람과 어린 아이까지 베풀지만 침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유기 이후의 신자에게만 베푼다.
J. M. 캐롤 박사가 정리한 『피 흘린 발자취』라는 책에 보면 침례가 구원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일찍 받을수록 좋다고 해서 생긴 유아 침례를 반대하다가 엄청난 사람들이 핍박당해 피를 흘렸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침례를 받으면 원죄가 없어진다는 교파도 있고, 침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교파도 있는 등 침례로 인한 중생과 유아 침례에 대한 주장까지 있지만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세례나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만은 부족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침례는 형식을 싫어하는 예수님이 인정하신 두 가지 의식 중 하나였다. 그 두 가지는 침례와 주의 만찬이다. 주의 만찬은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고, 침례는 예수님 안에 들어온 것을 표시하는 결혼식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나도 죽고, 예수님이 장사지낸 바 되셨을 때 나도 장사 지낸 바 되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온 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침례를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이 친히 본을 보이신 것과(마3:13-18) 승천 직전 유언으로 명령하신 것(마28:18-20), 그리고 초대교회가 엄수한 것 때문이다.
침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로마서 6장을 그림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4-5). 사실 예수님은 침례(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체험하기 위해, 또 본을 보이기 위해 당신이 직접 침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침례 받은 이유를 하나 더 든다면 순종의 의미,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겠다는 예수님의 순종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께서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12:50)고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신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이미 십자가에로의 행진은 시작되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 장사지냄을 의미하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부활의 표현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침례가 아니라 세례를 베풀고 있다. 형식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것은 침례임을 인정하여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회 중에는 침례를 베푸는 교회가 많다.
2세기에 쓰여진 12사도 교훈집이라는 『디다케』에 처음으로 “침례를 실시할 수 없는 경우 물을 부으라”라고 했다. 그리고 3세기 싸이프리안(Cyprian)이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의 문제가 아니니 세례도 좋다”고 하면서 세례를 허용했다.
8세기까지 모든 교회는 주로 침례를 주었다. 8세기 중반 로마교회 법왕, 스데반 3세가 침례 대신 세례를 주어도 좋다고 공포하고, 1311년 라벤나 회의 때 세례만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공동체의 메시지가 약화된 측면이 있다. 형식이 주는 메시지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칼빈 같은 사람들은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편리한 것을 생각했을까? 침례 형식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다.
여하튼 침례(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풀며 회개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죄악된 몸을 물속에 완전히 수장시키고, 다시 태어나는, 곧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운동이다. 이는 통상적인 이스라엘의 회개 방식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는 형식이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수7:6), 요한은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침례를 통해 우리 존재 자체를 완전히 수장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재난이나 전쟁이나 패배나 기근이나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단 금식이 선포될 때도 있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대하20:3), 우리에게도 지금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를 위해 침례를 베풀었다. 요한의 이 운동은 하나님의 개입을 위한 예비적인 운동, 하나님의 구원 행차를 위해 길을 다지고 깨끗하게 만든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이 예비한 그 길을 따라 ‘성령 침례를 베푸는 분’(baptizer)로 오신다.
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나?
침례(세례) 요한은 침례를 베풀다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알았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요한은 펄쩍 뛴다.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하나님이 침례(세례)를 받으신다? 말이 되나? 그러나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는 예수님의 허락요청에 따라 침례를 베푸는데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3:16)라고 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침례(세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며 철저하게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삼갔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침례(세례) 요한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를 소개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헤아렸다. 그래서 주인공이 아니라 ‘소리’라고 했던 부분을 강조했다.
예수님이 침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고 했다. 성령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인데 비둘기 형상을 취하여 내려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비둘기같이 부드럽게 임하셨다는 뜻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셨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내 아들’이라 하셨고,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다. 아버지의 기쁨, 최고 아닌가? 예수님의 침례식은 준비단계에서 공생애 무대로 나서는 일종의 전환점이요, 공식적인 사역의 시작점이 된다.
요한복음에서의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참된 것을 밝히는 영이라는 뜻이다. 침례(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초월자의 계시나 신비를 통해 메시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불렀다. 한계로 인해 하나님이나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스스로는 눈을 뜰 수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 역할을 해주신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성령 침례(세례)가 뭔가?
변화에는 화학적 변화와 물리적 변화가 있다. 물리적 변화는 섞거나 혼합하거나 상태가 변화하거나 형태만 변하지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화학적 변화는 아예 다른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마치 불로 태우는 것과 같이 아예 다른 물질이 되는 것이다. 요한의 침례가 물리적 변화 정도라면 예수님의 침례는 화학적 변화라는 뜻, 예수님의 침례는 우리 존재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간혹 성령 세례를 예배 때마다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 분들도 있지만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 우선 성령 침례는 1회적 사건이고, 성령 충만은 지속적 사건이다. 성령 침례는 어떤 신비한 경험, 방언을 한다던가 은사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 성령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 지속적으로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예배 때마다 성령 세례 받으라고 외치는 것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표현으로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마태복음서에서는 성령을 불과 아예 동일화시킨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 성령은 불이다. 우리를 씻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씻는 것이라면 계속해야 하지만 완전 변화는 한 번이면 족하다.
성령 침례는 우리 신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분이 달라지는 것, 더 이상 육체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노예나 주인의 차별이 없었다. 여성이나 남성의 차별도 없었다. 또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도 없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인격도 바꾼다. 더 이상 육신의 일에 매이고 육정에 매인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더 이상 육체의 일에 힘을 쏟지 않는다. 왜냐하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고 하셨기 때문이다. 대신 성령의 일을 하는 것이 즐겁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입맛이 바뀐다. 예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별로고 예전에 관심 없던 것이 즐거움이 된다.
어느 단계인가? 혹시 물 침례(세례)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나? 성령 침례(세례)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 침례(세례)를 베푸는 분이시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받게 될 것이다. 물로 침례(세례) 받고 준비된 자가 받는 것이 성령 침례(세례)다.
『피 흘린 발자취』에 성령 침례(세례) 받고 성령 충만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진리에 목숨을 걸고 증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마지막 기록이 나온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살해당하고, 마가는 죽을 때까지 거리에서 끌려다녔고, 누가는 목이 매여 죽었고, 베드로와 시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또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고, 야고보는 목 베임을 당했으며 빌립은 십자가에서 맞아 죽었고, 바돌로매는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회당에 내던져져 죽기까지 매 맞았으며 유다는 화살에,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다”고 했다. 비참하게 죽었을까? 어찌보면 그럴지 몰라도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다. 성령이 함께 하셨다. 성경은 말한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성령 침례(세례) 받고 성령 충만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이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