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에서 만난 (주)동국성신 강국창 회장은 기업적인 이야기보다 나라의 인구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 커보였다. 50년 이상 산업현장에서 뛰면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함께 참여한 그는 저출산 문제는 비단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과 민간, 특히 교회가 함께 나서야할 과제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5월 팔순 잔치를 치르면서 ‘인구감소대책 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사재 1억원을 출연했던 그였다. 결국 그의 호소가 통해 올해 4월26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인구포럼을 열기도 했다. 인구감소대책 국민운동본부는 정부와 지방단체,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와 민간이 함께 협력해 출산장려금을 지원하고 어린이 돌봄 교실과 자발예방상담실을 운영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산업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도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그가 국가조찬기도회 부회장이자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교회 10개 주요 교단으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면서 설립이 가능했다.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자라나 연매출 1천억원 이상의 강소기업 회장이 된 그의 성공스토리는 ‘흙수저도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제목의 베스트셀러로도 출판됐다. 가전제품 핵심 부품들인 냉장고 성에방지히터, 세탁기 공기방울펌프, 전기밥솥 온도조절기 등이 다 그의 손을 거쳐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것들이다. 이처럼 한국 중소기업계에서는 입지전적 인물로 통하는 강 회장은 81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혁신적이고 빠른 사고를 추구하며 산업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있다. 그는 현재 (주)동국성신을 비롯해 (주)가나안전자정밀, (주)동국개발(스프링데일 골프장) 회장을 맡으며 전 세계에 1,6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국내 공장만해도 인천과 광주, 창원, 제주 등 5개이며, 해외에서도 중국, 멕시코, 베트남, 폴란드 등 5개 국가에서 직접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 5대 경제단체인 인천경영자총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이런 그가 대한민국 인구감소 문제에 사재까지 출연하면서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구감소가 국가적인 차원의 큰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산업현장 인구 구성을 보면 대기업은 12%에 그치고, 83% 이상이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소기업도 제조업 일자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제는 모집공고를 해도 사람이 안 옵니다. 대우를 잘해주면 새로운 젊은이가 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에서 사람이 오는 현실입니다. 기업 경영에 정신이 없는 중에도 인구문제의 절박성을 피부로 느끼니 정부를 바라보게 되는데 정부가10년간 200조를 쓰고도 인구가 더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어 낭비밖에 되지 않는구나.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인구감소대책 국민운동입니다”
어린이 돌봄센터,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강 회장은 인구감소 대책은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과 민간도 협력해야 하며, 특히 교회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맞벌이 부부가 많고, 아이들을 믿고 맡길 양육시설이 부족하고 양육비도 부담이 크기에 교회가 실질적인 도움을 이들에게 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 한국은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인구문제가 개선되기 힘듭니다. 조금씩 조금씩 해가지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 돌봄센터를 해줘야 합니다. 이미 있는 교회 건물을 어린이센터로 주중에 운영하면 되는데 정부가 종교건물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으니 교회 스스로가 우리가 이렇게 어린이 돌봄센터를 할테니 정부가 필요한 부분 지원을 해달라고 해야합니다. 국회는 이를 뒷받침할 법을 만들어야 하고요. 그러면 장기적으로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왜 교회가 가장 좋은가 하면, 교회는 자원봉사자가 많습니다. 아이들 좋아하는 권사님들도 시간을 조금씩 내서 돌봐주는식으로 하면 보람도 되고 활력도 생길 것입니다. 젊은 부부들도 교회에 아이들을 맡기고 일하러 가는 것이니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요즘 어린이집 교사들이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상황에서 교회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런 구상은 한국CBMC를 통해서도 기업인들에게 전해졌다. 강 회장은 기독교 기업이 이 사회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현재 그 역할이 바로 저출산 대책이라고 제안했다. 강 회장의 말에 크게 공감하고 그 선봉에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 바로 한국CBMC중앙회 김영구 회장이다. 김 회장은 교회 어린이돌봄센터 등 실질적으로 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한국 기독교계가 모두 단합해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인구감소 문제를 위해 제가 언제까지고 관심을 갖고 움직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엄연히 기업인으로 기업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저보다 더 전문적이고 뛰어난 사람들이 이 영역을 맡아 잘 진행이 된다면 저는 또 산업일선으로 돌아가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강 회장은 몸소 실천을 보이고 있다. 그를 비롯해 주변에 뜻이 50여 명이 가족모임 '사랑회'를 만들어 지난해부터 출산하는 가족에게 직접 100만원의 장려금을 지급해주고 있다. 올해부터는 직원 출산시에도 100만 원, 10년간 매월 10만 원씩 장려금을 지원한다.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장 차이
강 회장에게는 국내 최초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그만큼 국내 가전제품 핵심부품 생산에 있어 신화적인 성공을 이어왔던 그다. 그러나 강 회장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라며 자신이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인생 첫 사업이 승승장구할 때 맞았던 실패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고 그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제대로 된 성공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흙수저 환경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해발 800미터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7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나 대학은 엄두도 못내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초등학교도 갈려면 첩첩산중 길을 지나야 됐고, 동네에 보이는 것은 탄광뿐이고 강물도 새카맣던 곳입니다. 고등학교는 유일하게 공업고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결국 공부 다 마치면 아이들을 탄광으로 보내기 위해 세워진 학교입니다. 제가 졸업한 것이 1961년도입니다. 그 때는 제 주변에 대학가는 사람이 없는데 그 때 강원산업 정인욱 회장님이 일류대학을 들어가면 등록비와 매달 장학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하셔서 거기에 귀가 번쩍 뜨여서 고등학교 2학년부터 공부에만 매진해서 결국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합격하게 됐습니다. 그 때 대학진학은 전혀 관심이 없었던 제 모교에도 큰 경사였고 동네에도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이후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ROTC 3기로 전역하고 1967년 국내 4대기업에 속했던 동신화학에 입사했다. 그리고 1970년에 동남샤프 과장으로 이직했다. 당시 집이 지방이어서 할 일이 마땅치 않았던 그는 숙직을 자처했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 산업분야에 있어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하게 된다.
“심심하니까 숙직실에서 나와서 야근하는 사람들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뭐 도와줄 것 없느냐면서 서로 잘 알게 되고 일도 어깨너머로 정말 많이 배우게 됐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하는 것이 안타까운데, 사장이 한가지만 알아서는 상황을 뚫어낼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지식을 구비하고 있어야 큰 힘이 되는 법입니다”
강 회장이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이 때였다. 숙직을 하며 습득한 다양한 지식이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금은 냉장고 문틀에 자석을 달아 쉽게 열고 닫히게 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때 당시에는 이것을 위한 부품인 냉장고 자석식도어 가스켓을 생산하는 국내 기업이 없었다. 강 회장이 처음 국내 첫 생산에 도전한 분야는 바로 이 냉장고 부품이었다. 사직서를 내고 받은 퇴직금으로 성신하이텍을 세워 도어가스켓 개발에 매진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이후 냉장고 성애제거용 히터 등 필수품목 개발 영역을 계속 확장해 나갔다. 국내에 4번째 공장까지 세우고 승승장구 하던 때에 정치권을 기웃거리게 됐다. 이 기간 동안 강 회장 모르게 회사에서 사고가 터졌다. 재정을 맡았던 전무가 아들의 탈영사건을 뒷수습 하느라 어음발행을 남발했던 것이다. 결국 회사로 복귀했지만 어음을 막지 못하고 첫 부도를 냈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내다가 갑자기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현실은 비참했다. 부정수표단속법 처벌 대상이 돼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됐고 친구들 집을 전전했다. 여러 친구들에게 한번씩 신세를 지고 났더니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극한의 환경에서 친구로부터 교회를 나가자는 권유를 받았다.
가장 절박할 때 받아들인 복음, 평생의 등불 돼
"처음 교회를 갔을 때 사람들이 다 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꼴 좋다고 놀리는 것 같고 부끄러웠죠. 기도하는 척 손 밑으로 보니까 그저 내 착각으로 그런 것이었어요. 교회는 할 일 없는 사람들만 다닌다는 생각을 고쳐 먹고 나름 교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기도원에도 가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 아버지 정말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지냈는데 10년도 안돼서 망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기회를 주셔서 제대로 기업을 해보고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눈물 흘리면서 기도를 하루에도 몇 번 했는데 기도원에서 내려가기 전날에 갑자기 마음 속에 ‘야 한번 해봐’ 누가 그러는 것 같고 갑자기 마음도 뜨거워지고 용기도 나고 그래서 그냥 주섬주섬 짐을 싸가지고 그 다음날부터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잘 나가다가 망하면 더 사람 앞에 설 용기가 없고 피하게 됩니다. 그 때 제가 40대 초반이었는데 그런 기도를 드린 이후 용기를 얻어서 다시 열심히 발로 뛰게 됐습니다.”
회사는 다 파산하고 경매로 넘어갔고 두 아들이 각각 초등학교1학년, 유치원생이던 때였다. 잘 나갈 때 전자부품 공급시장을 꽉 잡고 있던 그였지만 2년 사이에 자신이 만들던 제품들은 다른 곳에서 공급을 하고 있었다. 먼저 다시 문을 두드린 곳이 대우전자였다. 그 때 상무를 찾아갔다. 40대 초반 강 회장은 “제가 처자도 있고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한번 더 도와주세요”라고 사정했다. 2년만에 다시 만난 그를 생각보다 더욱 먼저 반겨주면서 “원래 공급받던 제품들은 당신이 다 만든 것이니 돈을 달라면 못주어도 일은 달라면 준다”고 했다. 그렇게 일감을 찾게 됐다. 이제 공장과 기계가 문제였다. 전에 관계하던 공장을 찾아갔다. 약 3천평 되는 큰 공장인데 종업원도 500명 되는 규모였다. 그곳에서 말하기를 ‘설비는 당신이 만든 설비고 하니까 필요하면 가지고 가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공장만 얻으면 됐다. 부지를 둘러보니까 유리창이 하나 없는 60평 정도되는 창고가 있었고 그 때 당시 700-800만원 전세금이 필요했다. 연락할 친구들 명단을 쭉 살펴봤다. 이미 다 한 번씩 신세를 진 상황이었는데 딱 한 친구에게 연락을 못했었다. 그 친구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70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더니 친구가 800만원을 빌려줘서 공장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동춘이라는 이름의 친구인데 ‘네 너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회사 이름을 동춘의 ‘동’, 자신의 이름 국창의 ‘국’을 따서 동국전자로 이름을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됐다.
“기업일을 재개하면서 그 때부터는 목사님을 모시고 반드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든 공장마다 매월 초가 되면 인천, 창원, 광주, 제주도 등 모두 지역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드리고 한달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한 것이 40년이 넘었습니다. 열심히 하다보니까 조그만 공장이 두 개가 되고, 대우전자에 이어 삼성전자를 찾아가니까 역시 반겨주면서 우리가 했던 것을 다른 회사들이 한다면서 일을 다시 줬습니다. 당시 금성, 지금으로 말하면 엘지전자에도 그렇게 가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회사들에 다 같은 업체로 접근할 수 없어서 삼성전자를 상대 할 때는 성신, 엘지는 가나안, 대우는 동국으로 협력업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우가 어려워지면서 대우를 상대하던 동국과 삼성전자 협력업체였던 성신을 합쳐서 동국성신이 됐다. 두 개 이름이 합쳐진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기업성장에는 ‘낭비제거’라는 그의 경영철학도 크게 작용했다. 불필요한 결제과정을 없애기 위해 피라미드 구조를 타파하고 모두 수평적 의사구조로 바꿔 모든 기업을 운영했고, 모든 인력과 업무는 효율을 최대화해 배치되도록 했다. 거기에 그의 근면성실함이 40년간 이어져 연매출 1천억원 기업을 이끄는 수장이 됐다. 제주도에 골프장을 짓게 된 에피소드가 특별했다. 살면서 큰 실패도 맛보고 바닥까지 경험해 봤지만 골프장 지을 때가 가장 인생에서 어디로 도망가고 싶었을 때라고.
“일을 한참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덧 60세 은퇴를 생각할 시기가 됐습니다. 58세 때 쯤에 제주도에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제주도에 양어장을 만들었는데, 그 양어장으로 인해 주민들과 마찰이 생겼습니다. 결국 주민들과 원만히 합의가 됐고, 오히려 나중에 주민들이 저에게 지역에 골프장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그 요청을 듣고 골프장을 하나 지으면 되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일을 시작했는데 골프장 허가나 설계 등 착공까지 하나하나의 과정이 모두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제주도는 전체 임야의 5%까지만 골프장이어야 하는데, 제가 골프장을 지으려고 하던 시기에 거의 5%가 다 찼다고 해서 급하게 가승인을 받아서 티오를 확보해 뒀습니다. 그 과정도 정말 힘들어서 한숨 돌리나 했는데 공문이 날아오기를 가승인을 받아 두고 3개월 안에 무조건 설계허가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 등에 연락해서 사람을 찾고 사방팔방 설계를 알아보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4년만에 착공을 했습니다. 동국개발을 만들어서 골프장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때가 또 한창 글로벌 경제 위기가 있을 때였습니다. 건설회사 만들어서 착공계를 내고 땅은 파놓았는데 중단할 수는 없고 돈은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사실 지금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라고 한다면 제주도 골프장 건설할 시기인 것 같아요. 사업을 다시 시작하면서도 도망가고 싶었던 때는 없었는데 그 때는 정말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완성된 스프링데이 골프 & 리조트는 한라산이 북서계절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환경으로 인해 겨울에도 골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인기 골프장으로 자리잡았다. 노후 준비로 시작했던 제주도 양식사업이 골프장 사업으로 확대되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골프장과 리조트 사업이 새로운 미래의 비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 출산에 달려있어
강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하나의 대기업에 수백 개의 중소기업이 달려있는 대한민국의 경제구조상 동반성장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정보력과 마케팅 능력이 부족하지만 대기업이 이 부분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중소기업과 협력해 지금까지 경제를 끌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이 강 회장의 설명이다. 기업경영의 개인적인 목표는 명문장수기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100년 이상 가는 기업이 우리나라에 부족한 만큼 오래도록 명맥을 유지하는 명문기업을 이끌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대한민국 경제를 이야기는 말미에 결국 저출산 문제로 화제가 돌아왔다.
“제가 처음에 공장을 할 때 일하는 사람 평균 나이가 20대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파악해보니 평균연령이 53세입니다. 미래가 있어야 합니다. 출산을 안 하니까, 애기를 안 낳으니까 도무지 나라의 미래가 밝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너무 인구문제를 소홀히 생각했어요. 저부터 자식 둘만 낳았으니 반성해야죠. 그래서 요즘 가는 곳마다 사비를 들여 인구문제에 경각심을 알리는 광고를 내고 있습니다. 교회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육아시설을 교회들이 적극 나서서 운영하자는 것도 바로 이런 취지입니다. 교회가 너무 교회 안에만 갇혀 있고 사회에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하는 반성입니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 천문학적 규모로 저출산대책 예산이 세워지는데 문제는 이것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인구문제는 인구청이라든지 한 전담부서로 전문화해서 모아야 한다. 그래서 헛되어 나가는 돈이 없어질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10년 , 20년 미래를 안 봅니다. 언론들이, 또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발휘해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야 하고 교회들도 적극 나서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