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어떻게 거룩하게 사는가?
그런데 문제는 거룩함을 받은 신자들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는가, 거룩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기본적인 지침 중 대표적인 구절이 오늘 소개한 디도서 2장 11~12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1~12)
물론 거룩하기 위해서 이 말씀만으로 해결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구절을 통해 우리가 거룩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디도서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경건하지 않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경건한 삶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 자체가 경건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경건한 사람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딤후 3:14~17)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충심 된 마음가짐으로 예배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경건한’이라는 뜻의 ‘하시드’와 ‘예배’라는 뜻의 ‘유세베스’, 그리고 ‘열심있는’이라는 뜻의 ‘드레스케이아’가 그들입니다. 정리하면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 하지 않는 사람이 거룩해지는 법이 없다는 경고를 들으시고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세상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세속주의 신앙은 심령밭을 헤치는 독극물입니다. 세속주의자는 단지 지금, 내게 주어진 일만을 위해, 그리고 오직 현세적 복을 받고 누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겐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을 들추어내면 아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 들으려조차 하지 않습니다. 또 이들은 미래의 이일들을 준비하거나 대비하는 등의 일에 관심없습니다. 오직 오늘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영국의 무신론자협회라는 단체에선 아예 대놓고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을 즐기라!!”고 가르칩니다.
특히 세속주의는 육적인 일들에 함몰되어 영적인 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다보니 진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싫증이 나고 자리를 피하거나 대적합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먹과 놀고 쾌락을 즐기는 일들입니다. 이들에게 거룩이라는 단어는 한심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들에게 사랑과 희생 같은 거룩한 단어들은 실제 생활에는 얻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당히 즐기는 것이 사랑이고 희생은 일방적인 손해이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들에게 오로지 육체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을 위한 이익추구만이 절대 선이자 목표입니다. 이런 정욕적인 일들에서 벗어나지않는 한 거룩은 없습니다.
셋째, 신중해야 합니다.
‘주마간산’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달리는 말 위에선 자세히 산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신중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눈 여겨 보거나 자세히 관찰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글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철학에 있어서 신중함은 ‘파토스’에 해당하는데 이는 단순히 감정만의 정열이 아니라 매우 사려깊고 깊이 잇는 정열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carefulness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중함은 좀 더 깊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잠언에서 신중함은 주로 슬기로운 것(prudence)과 관련됩니다. 슬기는 지혜에 해당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말씀을 듣고 학식이 더해지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고 합니다(잠 1:4~5). 이 지혜는 까불가불대고 가벼이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닙니다. 지헤는 신중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좀 여유롭게 차분하게 신중하게 신앙생활을 하시길 소망합니다.
넷째, 의로워야 합니다.
의로운 삶에 대해 더 강조할 바가 없을만큼 의로움은 거룩의 핵심입니다. 의롭지 못한 자가 천국에 갈 수 없듯이 의롭지 않은 자를 거룩한 사람이라 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움과 거룩함은 동의어이자 평생 동반자입니다.
4. 결어
진리를 수학하고 전도함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포괄적 조망 아래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포용적 조망 아래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포괄적이라 함은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확고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되 진리를 다루는 방식과 방법에 있어서 전체적 안목과 관점을 기준으로 폭넓은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전도방식이고, 포용적이라 함은 자기 진리 혹은 자기주장이 다소 깎이는 부분을 감수하면서 아량을 베풀어 결국 타협하는 자세로서 이를 두고 에큐메니칼한 복음전도방식이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방식이 절묘하게 어울러지고 조화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제를 하나님의 측면에서만 다루어서도 안 되고 인간의 측면에서만 다루어서도 안 됩니다. 만약 어느 한쪽 측면만 강조되면 어김없이 불균형적 신학 체계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성화, 즉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딤전 4:5에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두 가지 방편으로 말씀과 기도를 예시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최선의 노력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기도는 거룩의 3요소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성화의 씨앗을 심령 밭에 뿌립니다. 그리고 이 씨앗의 성장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은혜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햇빛과 비에 비유한다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곁가지를 제거하고 약을 뿌리는 일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입니다. 이제 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혹시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의’가 먼저 앞서지는 않는지 되돌아 보셔야 합니다. 교회봉사를 한답시고 다른 사람 앞에 자기 방식을 고집하고 지시하고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성화를 생각할 때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심령 밭에 뿌려진 씨앗들이 바로 이런 열매들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계속)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