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 요한의 증언이 계속된다. 3일간 이어지는데 첫째 날의 증언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증언이었다. 자신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라는 것, 자신의 운동도 메인이 아니고 준비 작업이라는 것, 그는 철저히 자신을 부인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 그래서 요한이 위대하다. 요한은 이제 역사의 바통을 넘길 준비를 마쳤다.
둘째 날의 증언은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 증언이다. 마침 침례(세례) 요한이 닦은 길을 따라 예수님이 오고 계신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29절)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 (Leon Morris)는 “26절과 32절 이하를 볼 때 요한은 벌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처음으로 찾아오신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는데 사실 지금까지는 좀 희미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요한의 증언, 메시지가 달라진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36절에서도 반복된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자신이 예고하던 메시아시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감동적인 모습, 드디어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위대한 순간이다. 이 순간을 포착하고 마음이 뜨거워진 요한은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의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어야 한다.
요한의 증언 속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명칭과 사역이 간략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단어로 압축되어 있다. 요한은 ‘보라’(Behold)라고 했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신약의 다른 집필자들이 사용한 총량보다 더 많은 횟수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요한은 오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의 이 회개 운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처럼 등장하신다. 요한의 증언이었던 “어린양을 보라”, 그 어린양이 누군가?
하나님의 양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말의 사상적 배경을 먼저 도드(C.H.Dodd)는 “묵시문학에 나오는 승리하는 어린 양, 계시록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반면에 사도 요한의 사상은 승리보다는 죄를 위한 희생의 사상이 더 뚜렷하기에 승리하는 어린양이 아니라 날마다 드리는 희생의 어린양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고,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라는 주장도 있다. 둘 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사야 53장을 근거로 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사53:7), 즉 ‘하나님의 종’ ‘고난받는 종’을 의미한다는 주장과 유월절의 어린 양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신 것을 강조한다. 특히 19장과 20장에서 두드러지는데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사건이 새로운 출애굽 사건과 같이 다룬 것 같다. 유월절 양은 먹기 위해 잡았지 제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지만 바울이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라고 한 것을 보면 반론은 힘을 잃는다.
‘하나님의 어린 양’, 라틴어로 ‘에케 아그누스 데이’(ecce agnus Dei), 요한의 외침에 감동 받고 음악에서 많이 다룬 주제다. 하이든의 ‘천지창조’(The Creation)와 멘델스존의 ‘엘리야’(Elijah)와 더불어 세계 3대 오라토리오로 일컬어지는 헨델의 ‘메시아’(Messiah)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했고, 작곡가 김두완도 “어린양을 보라”고 했다.
장중함이 압권이었던 곡은 20세기의 사무엘 바버가 작곡한 ‘아그누스 데이’(Agnus Dei)였다. 영화 ‘플래툰’에 삽입되어 더 유명해졌는데 ‘플래툰’은 누구도 쉽게 베트남 전쟁의 사악함을 건드리지 못하던 시기에 그 전쟁으로 인한 파괴된 인간상을 잘 그렸던 30년 전 영화다. 미군은 마약을 하고 미친 듯이 베트남인을 학살하고 전우끼리 싸우고 겁에 질려 총을 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미군 간에 사악함과 선함의 대결에서 사악함에 당하는 그 장면, 바로 그 무릎 꿇고 호소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에 흘러나오던 소름끼치는 음악,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한 이 곡의 장중함이 대단하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아픔과 인간성 파괴를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정화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림으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주 그려졌다. 16세기 초 독일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는 이젠하임 성당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제단화(Isenheim Altarpiece)를 그렸다. 이 그림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성화 중 예수님의 고통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에 압도적인 크기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그렸다. 팔은 뒤틀려 있고 공사장의 철근 같은 대못에 박힌 손은 경련을 일으킨 듯 부채살처럼 펴졌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아픔을 호소한다. 두 발도 아래위로 포개놓고 대못을 관통시켰다. 뼈가 돌출된 발밑으로 피가 흘러내린다. 독살스런 가시관에 머리를 찔린 예수님은 비참하게 한쪽으로 고개를 떨구었고, 고통스러운 듯 벌린 입은 목마름으로 하얗게 질렸다. 더 끔찍한 것은 예수님의 몸인데 얼마나 맞았는지 마치 문둥병처럼 수많은 상처들로 덮였고, 온몸 구석구석에 촘촘히 가시가 박혔다. 마른 몸에 숨이 가쁜 듯 가슴뼈들이 다 드러난다. 창에 찔려 찢긴 옆구리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나온다.
예수님 주변에 몇 사람을 더 그렸다. 실신한 어머니 마리아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요한, 그리고 십자가 바로 앞에는 엎드려 경배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그렸다. 맞은편에는 성경을 펼치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침례(세례) 요한을 그렸다. 그 뒤로는 좀 흐릿하기는 하지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라틴어를 새겼다. 또 그의 발치에 어린양 한 마리를 그렸다. 그 어린양은 십자가를 안고 있다.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성찬 잔에 쏟아진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성찬의 잔이 되어 세상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줌을 보여준다. 이 작고 무력한 어린양이 세상을 구원한다.
요한복음만큼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상징화한 복음서는 없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잘 드러난다. 시간부터 맞춰졌다.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바로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간이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9:14) 유대시간으로 6시는 현대시간으로 12시, 가장 더운 시간인데 이때부터 제사장들은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어린 양을 잡는다. 유월절 양은 그 뼈를 꺾어서는 안 된다. 보통 금요일 저녁이 안식일이고 유월절의 시작이기에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무릎뼈를 쳐서 빨리 죽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뼈를 꺾지 않아도 되었다(19:36),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고 요한은 보도하는데, 이 피는 문지방에 발랐던 유월절 양의 피처럼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효력이 있다. 예수는 유월절의 어린양, 하나님의 양으로 오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분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다. 요단강에 침례(세례) 받으러 나온 나사렛 청년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장차 오리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증언이다. 예수님은 아담 이래 온 세상에 가득해진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세상 죄, 그 무게가 얼마나 될까? 우리 개개인의 죄도 엄청난데 모든 인류와 온 우주의 죄를 다 모아 놓는다면 그 무게는 상상을 초월할 거다. 그런데 그 세상 죄를 어린양이 지고 간다? 힘없고 연약한 어린 양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가능은 한가? 가장 무거운 것을 가장 연약하고 무능한 어린양이 짊어진다는 것은 마치 어떤 노인네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 무력함이 주는 일련의 힘이 있다. 앞에서 이젠하임 성당의 그림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속에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감동 받아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건한 수도사들이나 경건한 성도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둥병자들이었다. 당시 이 그림이 걸렸던 이젠하임 성당은 문둥병자 수용시설이었다. 불치병이었던 문둥병자들, 격리된 채 살던 산 송장 같은 사람들, 그들은 먼발치에서 창살을 통해 예배드리는 서러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림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의 짓무르고 으깨어진 손발과 몸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 것이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신음하며 산다. 죄의 삯으로 온 지구촌이 난리다. 그래서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만 짊어지지만 그것도 버겁다. 죽기 직전까지 너무도 힘들게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일까? 장례식 입관 때 보면 대부분 편안한 모습이다. 다 내려놓았기 때문에 긴장하던 신경들이 편안해진 것이다.
어린양의 무력함이 주는 효과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거다. 강한 자가 와서 문제를 거뜬히 해결해주는 그런 그림이 아니다. 어린양의 모습은 하나님도 죄를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랄까. 공감이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같이 아픔을 이겨내자는 마음이 생긴다. 아니 그런 안스런 모습에서 “그 짐 제게 건네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주체성의 자각이다. 자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다.
본회퍼(Bonhoeffer)는 자신의 『옥중서간』(The Letter and Papers from Prison)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있어서는 무력하고 약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하심과 고난을 통해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 점에서 다른 종교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이 곤궁에 빠졌을 때 이 세상에 있어서의 신의 능력에 호소하도록 인간을 가르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기계장치의 신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에게 신의 무력과 고난을 가르친다. 고난당하는 신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가 있다.”
물론 어린양의 무력한 모습에서 오히려 절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도 어쩔 수 없는 무력함을 보며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신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을 발견하면 답이 보일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일으키고 걷게 하실 것이다.
어린양
하나님의 어린양, 어린양은 헬라어로 ’암노스‘(ἀμνὸς), 예수님의 흠 없고 죄 없으심을 상징한다. 모든 죄와 불의로부터 자유하신 예수님, 삶이 완전하셨던 분, 비난받을 것 없이 깨끗한 삶을 사신 분, 예수님은 어떤 약점도 부족함도 없는 분이시다. 어린양이 온유하고 참기를 잘하듯이 예수님은 온유하며 오래 참으셨다. 그분의 전 생애가 그러셨다. 모욕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며 온갖 방법으로 거짓 증언을 해도 온유하며 오래 참으셨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미 예언된 대로 사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원수 같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헤롯 앞에서, 그리고 모진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온유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극치를 보이셨다.
어린양의 모든 것이 사람에게 유용하듯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주님의 살은 우리의 양식이요 주님의 피는 우리의 음료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의의 옷, 구원의 옷을 입혀주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래서 어린양은 약한 양이 아니라 강한 양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다. 천군 천사와 수많은 성도들이 모인 하늘의 영광스런 잔치 중심에 계신 어린양, 마치 왕의 대관식 같기에(계5:7) 어린양이 아니라 왕이요, 권력자다. 최후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령관이기도 하다(계17:14).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의 검이 원수들을 단번에 물리친다. 파워 있는 어린양, 능히 세상의 모든 짐을 지실 수 있는 분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어린양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겠다고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시기에 충분한 분이다.
그분께 우리 인생의 짐을 맡겨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으면서 끌어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선을 다한답시고 결과마저 책임지려 할 때 우리는 그 짐에 시달릴 것이다. 어린양을 보내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래야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리고 설령 결과가 신통치 않아도 감사할 수 있다. 책임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또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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