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엄청난 축복이다.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지 의문을 갖기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였는데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한 것, 충격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차별받는 사람들도 예수 믿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야만이나, 주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다 가능하다. 황제도 노예도 다 ‘형제’다. 형제자매는 평등성과 공동체성을 완벽히 구현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신다는 표현도 충격적이지만 그 다음 절은 더 충격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 엄청난 선언, 기독교가 지닌 가장 비이성적인 우주 최대의 사건이다. 우주의 법인 로고스(logos)가 육신이 됐다는 것, 영이신 하나님이 고깃덩어리인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살짝 빌리셨다는 뜻이 아니다. 제우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 엽기적인 행동을 하거나 인간에게 은혜나 심판을 베풀었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 곳곳에서 신이 인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난다는 신화가 있기는 하지만 다 신은 그대로 있고, 그저 인간을 도구 삼은 것뿐이지만 본문은 하나님이 God-man,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 인간이 겪는 연약함과 희로애락의 고통을 다 겪으신다는 것이다.
영혼만 신이라는 것도 아니다. 귀신들린 존재 같은 하나님과 인간의 공존 방식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렇게 오해했다. 가현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이 침례 받을 때 살짝 임했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빠져나갔다고 한다.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은 이런 불안정한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이런 오해가 생길까봐 사도 요한은 육체로 오셨음을 분명히 했다.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사륵스’(sarx)라는 단어가 그렇다. 유혹에 노출되기도 하고,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고통과 욕구를 느끼는 그런 몸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좀 더 중립적이고 물질적인 몸을 가리키는 ‘소마’(soma)라는 표현도 있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사륵스’를 썼다. 하나님이 반신, 반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고, 33년의 생애를 살다가 십자가에서 인간처럼 죽으셨다. 말이 되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주 최대의 기적 중의 기적이다. 복음의 토착화의 모범이기는 하지만 상상도 못할 표현, 그 이유나 논리적 가능성을 따진다면 답도 없는 미궁 속을 헤매기만 할 수수께끼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이게 믿음이다. 사도 요한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선포할 뿐이다.
복음주의 신약학자 F.F. 브루스의 제자인 김세윤 박사는 “이 14절이야말로 복음의 주제와 요한복음의 논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14절은 위대한 전기(轉機)이자 복음의 주제이며, 요한복음의 논지이자 기독교 교리 가운데 기독론(基督論)의 핵심이다. 심장이 왜 뛰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사람이 알 필요는 없지만 그 심장이 지금 뛰고 있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하면 건강을 유지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성육신이 어떤 의미인지를 요한의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바란다.
독생자의 영광
가끔 식당에 가보면 대통령이나 연예인들이 방문했던 집이란 팻말과 사진이 붙어 있다. 또 TV 프로에 나왔던 곳이라고 홍보하는 식당도 있다. 영광의 식당, 맛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 한때 전남 장성군과 강원도 강릉시는 서로 홍길동이 자기네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다투었다. 유명인이 태어난 곳이면 명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거하셨다면 그 상황을 설명하는 최고의 단어는 ‘영광’일 것이다.
사도 요한도 본문에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했다. 본문에서 ‘거하셨다’는 단어는 헬라어가 ‘에스케노신’(eskenosin), ‘장막을 쳤다’는 뜻이다. 이를 J.R.힐은 “하나님이 그 백성 중에 거하신다는 의미로 쓰인 ‘쉐키나’(shekinah)라는 히브리어의 메아리를 담고 있다”고 했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칭하는 단어다.
모세가 장막을 완성했을 때의 모습이 출애굽기 40장에 나온다. 당시 사람들은 구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했다(출40:34-35).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잠깐 뵙고 내려오지만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났다고 했다(출34:30).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거다. 이게 영광이다.
사도 요한도 그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쉬운 말이 아니다. 나사렛의 허름한 어린 아이의 몸에서 영광? 어울리나? 그냥 ‘예쁘네’ 그러지 영광이 보인다고는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리고 영광이 보였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하지만 제자들도 변화산상에서 잠깐 예수님의 본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마17:2).
스데반도 죽음 직전에 이 영광을 봤다(행7:55). 영안이 열렸던 모양이다. 물론 주관적인 사건이었다. 스데반이 본 영광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영광은 눈이 열린 사람들이 보는 거다. 눈이 열리기 바란다. 한 번 본 사람은 그 은혜로 평생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다. 우리와 함께 동거하신다는 거다. 아무랑 동거하나? 아니다. 가족이 되신 것, 우리가 그만큼 영광스런 존재가 된 거다. 멸망할 수밖에 없던 우리가 신성해진 거다. 지성소나 성전이 거룩한 이유가 뭔가? 하나님의 임재 때문 아닌가? 이 임재가 우리에겐 ‘은혜’다. 우리 능력이 아니다. 성막이나 성전은 사실 대리석을 쓰고 금치장을 한다 해도 이방 신전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피라미드나 고대 바벨론의 신전들이었던 지구랏트는 그 위용이 대단했다. 하지만 거룩한 곳은 아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성전보다 오히려 광야의 장막을 더 거룩하게 생각했다. 광야에서 방랑하고 있을 때의 예배처, 천으로 덮이고 금도금하고 바닥은 모래바닥, 그리고 날마다 움직여야 하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 몸이,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다(고전3:16).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당시 7대 불가사의에 해당할 정도로 웅장했어도 그곳을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성전이라 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허름한 상점의 한켠에 모여 예배드렸지만 어느 신전보다 더 거룩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보기에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영광,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이라 했다. 김세윤 박사는 “여기서의 ‘독생자’(μονογενης)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상속자’란 의미”라 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상속자와 하나되는 엄청난 영광이다.
충만한 은혜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변 중 으뜸이 바로 성육신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성육신, 인간 편에서는 임마누엘, 이건 최고의 사랑이자 은혜다. 은혜가 뭔가? 조건 없이 베푸는 호의, 무제한 거부할 수 없이 주는 영원한 사랑이다. 레온 모리스는 은혜를 ‘기쁨의 원인이며 지극히 호감스러운 것’이라 했다. 이건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은 함께함이고, 입장이 같은 것인데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셨다. 입장이 같아진,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신 것이다. 하와이 군도의 몰로카이 섬에 있는 나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섬기던 다미엔 신부 같은 모습이랄까? 다미엔은 나병 환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병환자 되기를 기도했고, 결국 응답받고 나병환자가 되어 그들을 섬겨 ‘나병 환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성육신이 바로 이런 사랑이다.
신과 인간의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신은 능력이 있고 신대로 계획이 있지만 인간은 한계에 부딛히며 조급하다. 그래서 갈등하고, 원망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내재하신 하나님’이 되신 거다. 구원을 위해서다.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없어졌다. 신과 함께 세상의 문제를 풀면 된다. 이제 인간의 문제는 신의 문제가 됐다. 성육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으신 하나님, 특권도 버리셨다. 비참한 인간이 되고, 자기 목숨마저 내어놓으셨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악에 대한 절박한 문제 때문에 선교사처럼 오신 거다. 한강에 자식을 밀어넣는 부모는 ‘죽일 놈’인데 마치 그런 모습처럼 십자가로 죽을 것을 알고도 독생자를 보낸 하나님이시다. 왜 그러셨나? 그만큼 인간이 비참했던 거다. 너무 불쌍하고, 너무 답답해서 친히 인간이 되어 인간의 일생을 사신다. 그래서 성육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폭발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옛날 어떤 임금이 반란을 피해 평복을 입고 한 시골로 피난 가서 신분을 숨기고 한 농부의 집에서 며칠 유하게 되었다. 고맙게도 농부가 누군지도 모르고 대접을 너무 잘했다. 반란이 평정되자 임금은 환궁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은 여전히 신분을 감추고 감사인사를 하며 은혜를 갚겠다고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농부는 소원이 뭐 있겠냐며 건강하고 길손 대접할 정도는 되니 감사하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말하라 했더니 "며칠 있으면 내 환갑날인데 그날 오셔서 같이 식사나 하시면 좋겠소이다“
며칠 후 농부 환갑날 임금이 행차하셨다. 임금이 잔치에 오신 것, 농부의 환갑잔치는 큰 축복의 날이 되고 그 농부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은혜다. 하나님은 손님이 아니라 함께 살려고 오셨다. 농부는 임금을 몰랐지만 임금은 농부를 알았던 던 것처럼 우리를 알기에 찾아오셨다. 농부는 착하고 진실하고 욕심이 없는 노인이었지만 우리는 욕심쟁이, 고집쟁이, 교만하기도 하고, 방탕하기도 하고. 그런데도 우리와 같이 살겠다고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셨다. 그래서 성육신은 생각할수록 큰 은혜다.
충만한 진리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인간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서다. 진리는 거짓과 과장과 속임수가 없는 완전한 진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강조했다. 요한은 1장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4번(14, 16, 17절) 쓰고 신기하게도 이후에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은혜’와 연결된 ‘진리’라는 단어는 25번이나 사용한다. 요한의 관심은 ‘은혜’보다 ‘진리’였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은혜만 좋아하는 자기식의 신앙인들이 많았기에 진리를 좇는 균형 잡힌 신앙인이 되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그래서 요한복음 여행은 ‘진리를 좇는 여행’이다. 진리는 모든 것을 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기대하며 여행을 즐기기 바란다. 예수님은 육신의 정욕과 탐욕과 자랑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세상에 진리로 오셨다. 독생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분이란 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신 것, 예수님 스스로도 “나는 진리”(14:6)라고 하셨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의 각성한 자 기억하나? 모두가 다 그림자의 세계를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 때 한 사람이 빛을 보고 참된 실상을 알린다. “우리 사는 세상은 거짓이다, 참된 실체가 있다, 내가 봤다, 너희도 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반응은 오히려 미쳤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투다.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답답함이 있고, 빛을 본 자의 명확함과 담대함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이제 우리는 거꾸로 육신이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대 목표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신이 되는 거다(요10:34-35). 참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신다는 거다(요15:15).
목표는 고상해야 한다.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때 초등학교 4학년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개와 닭과 돼지를 좋은 일 하라고 이 땅에 보냈는데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와서 물었단다. 각각 “무엇 하다 왔니?”하고 물었는데 닭은 “저는 늘 주인에게 시간을 알려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꼬끼오'하고 일어나 일하라고 시간을 알려 주었습니다” “잘했구나, 착하구나”하며 머리에 벼슬을 달아 주었단다. 그 다음 개는 “저는 늘 주인을 사랑해서 순종하고, 주인집을 잘 지켜드렸습니다” “너도 착하구나“하고 다리를 하나 더 달아주었단다. 원래 개는 다리가 3개였단다. 그래서 소변을 볼 때 다리를 드는 게 원래 3개였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돼지는 ”저는 할 일이 없어서 먹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돼지의 코를 잘라 버렸단다. 그래서 돼지는 코가 납작해졌단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육신의 습관이나 탐욕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 분노하고 다투고 염려하고 실망하지 말고 신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어떻게 닮나? 같이 살면 닮는 거다. 오래 믿었는데도 안 변했나? 같이 살지 않아서 그런 거다. 말씀 따로 내 스타일 따로,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사랑과 정의와 생명이라는 신의 음식이 우리의 음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수준까지 맞출 수는 없겠지만 성육신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될 것, 성육신의 자세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이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