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롬 5:18)
1. 다른 주장들
성경에서 칭의 교리는 어떻게 죄를 지은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무한히 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은총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다시 말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지어 정죄 받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불의한 자들을 의롭다고 칭할 수 있는가? 하는 ‘칭의의 근거’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 칭의의 교리는 다른 구원론 교리들의 구심점이 됩니다. 칭의의 대상은 지난주에 살폈듯이 죄를 지어 완전히 타락한 상태에 놓인 인류입니다. 이런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즉 십자가 죽음 때문입니다. 또 이 칭의는 그저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택하여 두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적용되고 실행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결과, 죄인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성화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칭의의 완성은 모든 시대의 의인들이 변화된 육체로 부활하여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경험할 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칭의 교리에서 따져 볼 논쟁거리가 제법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칭의는 죄인에게 일어나는 순간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계속 진행되는 사건인가. 만약 전자가 옳다면 칭의는 성화와 관계없는 선언에 불과한 것인가, 후자가 옳다면,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등등 논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가장 핫이슈인 칭의의 근거가 무엇인가, 즉 칭의를 어떻게 해서 얻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알아봅니다. 교회사에서 칭의의 근거에 대해 다르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첫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바울 사도가 가르치기를 ‘의’는 유대인들의 의식법을 순종함으로써 얻어질 수가 없고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것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한 마디로 신학적 낙천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펠라기우스(419년 사망)는 인간은 아담의 타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원죄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본래적으로 올바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으시는 관계는 형벌적 요구를 강제하는 엄격한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탕자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이 관계를 기초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스스로 도덕적으로 진보하는 이들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16세기에 등장한 <소시니언주의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펠라기안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주장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 죗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가라앉혀야 할 진노 같은 것은 원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죄책이나 의와 같은 도덕적 속성들은 전가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각 사람은 자기 죄를 스스로 보상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9세기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 신학>도 비슷한 칭의론을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는 알브레히트 리츨(1889년 사망)이라는 사람은 “칭의의 배경은 하나의 거룩하심이나 진노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의 관념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게 합당한 관념이며 인자하신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그들과의 교제를 회복할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는 분”이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을 잘못 상상하여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거나 진노하시는 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리신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리츨은 “칭의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하시는 방편인 법적 행위라는 견해는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그의 견해를 정리하자면 칭의는 “죄 사함이나 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근절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지, 죄인에 대한 완전한 죄 사함의 법적인 선언, 즉 ‘의인으로 칭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정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은 칭의 교리는 현대인들과는 거의 연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법적으로 전가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합니다. 이들은 칭의란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주어진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파멸로 이끄시는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22년에 죽은 라이먼 애벗 같은 이는 노골적으로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모두가 실상은 펠라기우스주의자이거나 이것의 영향을 받은 자들의 사상입니다.
둘째,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칭의를 과정으로 보고 칭의는 시작에서 결말로 발전하는 것으로 봅니다.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열었던 트렌트공의회(1546~1563)는 칭의를 세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즉 칭의의 준비와 시작, 그리고 증대로 나누었습니다.
① 칭의의 준비: 각 신자는 선행적 은혜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② 칭의의 시작: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와 소망, 사랑을 세례 시에 수세자의 영혼 속에 주입하여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수세자를 의롭게 만든다. 따라서 칭의는 단지 죄 사함만이 아니라 은혜의 자발적인 수용에 따른 결과이다.
③ 칭의의 증대: 칭의는 의롭게 되는 과정이다. 순례자가 천국에 가려면 칭의가 반드시 증대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과 교회의 계명을 준수하고 믿음과 선행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 의가 자라난다. 한편 칭의는 중한 죄로 상실될 수도 있지만 고해성사로 회복될 수 있다.
가톨릭의 칭의를 종합하면, 아무도 어떤 오류도 용납하지 않는 믿음의 확실성을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고 알 수 없다고 전제하고 개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부합하는 선행으로 자신이 받은 칭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오직 죄인이 선행이나 믿음에 따른 적정한 행위 없이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는 파면에 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셋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칭의를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우주 통치를 강화시키는 죄 사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칭의가 죄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킨다는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모든 인류의 죄로 여긴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모든 신자의 의로 간주하신다는 칼빈주의적 견해를 부정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거룩하지 않은 자를 거룩하다고 간주하신다는 주장은 반율법주의적이고 방탕하고 부주의한 사람을 부추긴다고 비난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철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존 웨슬리(1791년 사망)는 칭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①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죄와 죄책에서 자유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고,
② 다음으로 그들의 도덕적 성품을 개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견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는“”칭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창조된 어떤 의도 믿음의 윤리적 혹은 도덕적 차원 때문에 실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의를 선언함은 의로운 삶을 사는 능력을 이미 주신 것이므로 의롭지 못한 삶의 책임을 인간이 져야하기에 칭의는 결국 성화를 보고 판단할 문제로 본 것입니다.
실제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늘 죄인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하시어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지만 실제로 많은 인간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함으로 인해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리처드 왓슨(1883년 사망) 같은 알미니안 조직신학자는 “모든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 전제하면서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이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둘 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비난했습니다. 유명한 찰스 피니(1875년 사망)도 같은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넷째, 해방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만유재신론의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합니다. 즉 구원은 모든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적인 구원이라 말합니다. 전 사회에 억압과 불평등과 자유의 상실 같은 부정의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전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 구원이라 말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칭의란, 결국 그리스도의 아가페적인 실천을 매개로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고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신정통주의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1968년 사망)에 의한 주장으로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영원히 택하시고 은혜로운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이 언약을 어겼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주님으로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친히 구속되시어 언약의 파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칭의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언약을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원한 칭의의 작정을 계시하시고 죄로 인해 깨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하신 것이고 부활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시어 마침내 죄와 저주의 문제를 종식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르트의 칭의는 믿음이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계시된 것이므로, 그리스도에 의한 의의 전가가 아니라 깨진 관계의 회복이 관건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인간은 영원 전에 하나님의 결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존재이기에 때가 되어 복음에 반응함으로써 이때 하나님은 칭의를 자신을 위한 실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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