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학술원(원장 황대우)이 최근 ‘프랑수아 투레티니의 작품을 통해 보는 신학과 설교’라는 주제로 프랑수아 투레티니 출생 400주년 기념 제14회 칼빈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투레티니 전공자인 니콜라스 커밍(Nicholas Cumming) 박사와 권경철 박사를 초청해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먼저, ‘루터 대 루터파: 프랑수아 투레티니의 「변증신학강요」에서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란히톤의 수용과 권위’라는 주제로 발제한 니콜라스 커밍 박사는 “루터와 멜란히톤은 투레티니에 의해 합법적이고 권위 있는 개혁가로 여겨졌다. 투레티니는 1623년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1653년부터 1687년 사망할 때까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신학 교수로 가르쳤고 동시에 평생 동안 제네바에 있는 이탈리아 회중의 목사로 일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투레티니의 대표작인 「변증신학강요」(1679~85)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뿐만 아니라 초기 근대 유럽의 개혁주이 공동체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저술됐다”며 “개신교의 이 분열된 시대에 투레티니는 자신의 개혁 정통 교리를 발전시켰고, 다양한 자료를 사용하여 그의 관점에서 개신교 권위자들 사이의 분명한 통일성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투레티니는 1517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종교개혁가)의 최초 항의가 있은 지 100년이 더 지난 후에 태어났다. 그의 저서 변증신학강요에서 루터에 대한 첫 번째 언급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라며 “투레티니는 자신의 신학에 주요 반대는 분명히 ‘루터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루터파에 대한 방어 수단은로 루터를 활용한다”고 했다.
이어 “투레티니에게 루터는 진정한 정통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창사지이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서 사단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숨어 있던 보이지 않는 교회가 은신처에서 나와 섭리적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교회를 전파하는 전환점이었다”며 “또한 투레티니의 교회론에서 루터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기독교의 신조와 고백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커밍 박사는 “루터 외에도 그의 제자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독일 신학자)은 투레티니의 작품에서 드물게 사용된다”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투레티니의 입장에서 히브리어 성경의 ‘의식법’과 관련해 멜란히톤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과 구약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정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결론은 17세기 개신교 사이의 고백적 차이를 분별하는 데 권위 있는 것으로 분명히 여겨졌으며,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루터파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며 “그의 변증신학강요에서 투레티니는 ‘독창성의 자의식 부족’으로 이 강의가 시작됐음을 설명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강의는 투레티니가 교부들과 칼빈을 사용한 것을 넘어 종교 개혁 당시 ‘선지자 학파’의 다른 구성원을 포함하기 위해 출처와 사상을 보다 관대하게 사용한 것을 검토함으로써 이전 학자들이 주장한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며 “이런 식으로 우리는 17세기 스콜라 신학자들의 출처가 기독교 교의학의 더 넓고 거대한 전통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서 복잡하고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두 번째로 ‘목회자 투레티니가 본 구약의 그리스도: 10개의 소논문과 설교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한 권경철 박사(열린교회 부목사)는 “투레티니의 ‘변증신학강요’를 통해 구약의 그리스도 문제에 있어서 투레티니가 코케이우스 반대파인 레이데커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동시에 투레티니의 설교와 10개의 소논문을 통해서는, 논쟁을 더 이상 키우고 싶어 하지 않는 신중하며 진중한 목회자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권 박사는 “투레티니는 신학자인 동시에 목회자이기에, 신학자로서 자신이 가진 소신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푸치우스주의자들과 코케이우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이라며 “‘변증신학강요’에서도 이미 암시되었던 이러한 관대한 태도는, 설교와 10개의 소논문에서 한층 더 잘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작품들에 코케이우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투레티니가 제네바 교회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는 코케이우스주의 논박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제네바 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소뮈르 신학 문제 및 낭트 칙령의 폐기로 인한 프랑스어권 개신교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온 힘을 쏟기로 결심했음을 눈치 챌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프랑스의 위협 앞에 제네바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네덜란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현실적인 필요성 역시도 그로 하여금 말을 아끼도록 했을 것”이라며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은 제네바 교회와 사회를 평안하게 지키겠다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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