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의롭다고 여기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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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칭의의 두 번째 요소는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최더함 박사

당신이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진실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즉시로 당신을 의롭다고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교회사에서 이 ‘은혜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율법주의에 대항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의롭다 하실 리가 없다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는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수반되어야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한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율법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안에서 길을 잃고 아직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 얻는 믿음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가 있기에 이루어지고 내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칭의를 구하는 자들은 칭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율법적 표준에 이른 후에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육체를 수련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금식하고 도를 닦는 등 고행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고행을 통해 심신을 수련한 사람에게만 구원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목표에 도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마르틴 루터도 그런 가르침을 받으며 사제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511년, 28세의 나이에 사제의 자격으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피가 나고 무릎이 깨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마음에 롬 1:17의 말씀과 함께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이런 행위가 구원에 무슨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바로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와 고국으로 돌아와서 진짜 구원은 참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드디어 1517년 종교개혁의 깃발을 치켜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복음의 시대, 즉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음을 설명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선포합니다. 그 선포가 3장 21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뉘니 데’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그런 시대에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분을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디카이오쉬네, righteousness)란, 완전한 하나님만이 가지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런 의가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롬 1:17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디카이오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오직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무서운 심판자의 공의만 생각합니다. 마르틴 루터도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이해하고 인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 당신의 ‘의’를 선물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어 죄인을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주로만 기억한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없다면 아무도 자신의 죄를 씻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중 롬 3:23~24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가 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들입니다. 그 실상들을 사도 바울은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를 읽다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부끄럽고 놀랐는지 한참 동안 정신 줄을 놓았습니다. 23절에 보니 저는 우상을 섬기던 자였습니다. 24절을 보니 저는 마음의 정욕에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26절을 보니 저는 부끄러운 욕심쟁이였습니다. 28절을 보니 저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던 자였습니다. 29절에서 31절을 보니 저는 모든 생각이 악한 자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 데 선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요 예수쟁이들을 놀리던 자요 교회가 사회의 독이라고 생각하던 자였습니다. 2장 1절을 보니 저는 남을 판단하는 자요 2장 5절을 보니 저는 고집스러운 자요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던 자요 7절을 보니 저는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3장 9절에서 18절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며 그냥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20절의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로 그 순간, 저에게 강력한 생각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니까 예수를 믿어보자”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의 선언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느새 죄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삶은 고달프고 여전히 가난과 질병과 싸우고 있지만 갈수록 제 영은 맑아지고 하나님께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 죄인에게 베푸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할 뿐입니다.

둘째,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죄인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습니까?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비밀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들을 미리 선택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1:4~6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혹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 미리 아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예지예정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이미 예정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듯이 하나님은 창세 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택하시고 무조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선택입니다(딤후 1:9, 롬 9:11~12, 15~23).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데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 중 가장 위대한 계획이자 뜻이자 섭리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죄 값을 다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간으로 오시어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대속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양 사람이거나 한 사람의 영웅이거나 성인쯤의 수준에서 논할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모든 인류를 대신하는 대속물이자 희생제물입니다. 주님이 제물로 바쳐졌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제물이 되지 않고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갈 3:13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념하는 성례전에 참예하는 것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흘리신 피의 값으로 천국의 만찬을 즐기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들이 부모들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모은 재산으로 복을 누리는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덕으로 우리가 구원의 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넷째,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 하셨습니다.

은혜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게 은혜의 마음이 없다면 그는 진짜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자식은 사랑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 하면 그는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천로역정>의 작가 존 번연은 <은혜로 구원받다>라는 책에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와 인자하심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에서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칭의는 은혜로 주어지기에 ‘값없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은 우리 행위 없이 공로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도로레안’인데 이는 ‘선물로’라는 뜻입니다. 이 ‘도로레안’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4. 결어

청교도 토마스 왓슨(1620~1680)은 “칭의를 무시하는 자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왜 여러분은 구원하는 치료제가 있음에도 그것을 바라지도 않으며 죽어가고 있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칭의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칭의 얻는 유일한 조건은 오직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롬 3장 22절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디아 피스테오스)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장 30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다시 내립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