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기적 사건과 기록 내용을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구약의 오경과 에스더서나 요나서 등이 그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집요한 의심을 받습니다.
대다수의 경건한 성도들은 성경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이 역사적 신빙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드립니다. 물론 성경 안에서는 은유와 비유와 여러 가지 서사적 기법이 사용되면서 다양한 메타포가 공존하기에 단순 역사 기록물의 가치만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역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역사성에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그렇다면 간혹가다가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주장을 마주했을 때,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 성도들은 최소한의 성경 신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각 성경의 기록 목적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에스더서에 대한 역사성을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합니다.
1. 에스더라는 이름의 바사 왕후나 유다인 왕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반론->
카렌 좁스에 의하면, “바사 왕의 문서보관소에 에스더 이름이 없는 이유로 에스더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바사의 기록물은 왕조 계승을 추적하는 형태로 기록되었고, 그 가운데 왕위 계승자를 출산한 왕후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에스더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여, 역사가 에스더서의 내용과 반대된다고 말하거나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2. 고대 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아내 이름을 “와스디”가 아닌 “아메스트리스”라고 부른다.
반론->
‘와스디’와 ‘아메스트리스’는 동일인물이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와스디는 페르시아의 고어에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유사하게 들리는 이름이고 아메스트리스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어원의 기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순수한 성도들이 한쪽으로 편향된 학자들이 일방적으로 던지는 정보에 매료되어선 안됩니다.
3. 아하수에로가 번복할 수 없는 법을 재정하면 통치에 어려움이 있다. 하만의 청을 들어주는 왕의 이야기는 허구일 수 밖에 없다.
반론->
왕의 새로운 정책 실행과 선포는 당시 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정치학 논리로 당시 통치방법을 평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그 외에 BC 5세기 바사에 관한 고고학적 근거들은 에스더서의 이야기가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에 나오는 관리 지방 통솔의 수치 등의 차이는 과장법이나 문학적 장치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으나 에스더의 사건을 허구로 보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무모한 도전입니다.
비평사학자들은 “근거가 부족하면 겸손히 잠잠하라”라고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런 공격에는 역으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역사적 사료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렇다면 에스더서가 거짓이고 허구라는 자료는 명백한가??
성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역사성을 단언하기 힘들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참일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됩니다.
과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학적 네러티브와 사실성을 포함한 역사적 재진술 중 반드시 택 일을 해야 할까요? 만일 그래야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분법적 논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에스더서를 볼 때는, 이 성경이 역사적 사실성에 문학적 네러티브가 덧입혀진 하나님의 구속 스토리라고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자세일 것입니다.
#김요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