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과 한성감옥Ⅱ-1: 감옥 안에서의 독서·전도 활동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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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신앙연구: 신앙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중심으로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3. 감옥 안에서 활동

우남에게 있어서 한성감옥은 처음에는 고통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그의 말처럼 축복의 방과도 같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우남은 이곳에서 많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인격형성과 사상에 심대한 성장을 이루며 또한 그의 사상적, 정치적 동지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생 그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그를 인도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였던 것이다. 우남은 자신의 옥중생활을 기록하여 월간으로 출판되고 있는『신학월보』에 기고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가 감옥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이승만』에서 유영익은 우남의 영어생활을 3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제1기는 체포된 다음 병영과 한성감옥에서 미결수로서 목에 칼을 차고 기독교 신앙생활에 전념했던 기간(1899.1.9-1899.7.11), 제2기는 평리원 재판을 거친 다음 정상적인 감옥생활을 하면서 초조하게 특사 소식을 기다렸던 시기(1899.7.11-1900.2.14), 제3기는 조기 석방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새로 부임한 감옥서장 김영선(金英善)의 특별 배려로 독서와 저술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1902년 5월에 입감한 이원긍, 이상재, 유성준, 등 독립협회 동지들과 함께 옥중학교와 서적실을 개설, 운영하던 시기(1900. 2.14-1904.8.9) 이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세 개의 구별된 시기를 염두에 두면서 그의 독서활동, 전도활동, 교육활동 그리고 저술활동을 살펴보기로 할 것이다.

가. 독서활동

우남은 선교사들이 차입해 준 523권의 책을 가지고 옥중 도서실을 개설 운영하였다. 자기 자신은 이때 뉴욕 아웃룩(New York Outlook) 등 영문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중국에서 수입된 신간 서적을 많이 읽었다. 우남은 옥중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는데, 그가 읽은 책들은 청말 중국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준 것들이었다. 우남은「옥중잡기」를 통해 자신이 옥 안에 있으며 옥 밖의 보통 사람들 보다 더 훨씬 더 많은 양의 독서를 했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우남은 영문으로 된 단행본과 신문, 잡지들을 즐겨 읽었고, 중국 상해의 광학회(廣學會)를 통해 출판, 배포된 기독교 및 청말(淸末)의 제도개혁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신·구약 성서 및 기독교 교리서 이외에 역사서, 외교 및 국제법 관련 서적, 그리고 시, 소설 등 문학서적을 읽었다. 그가 독파한 사서(史書) 가운데에는, 멕켄지(Robert Mackenzie)의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The Nineteenth Century: A History), 피터 팔리(Peter Parley)의 『만국약사(萬國略史)』(Universal History), 스윈턴(William Swinton)의 『만국사략(萬國史略)』(Outlines of World's History),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의, 『조선사기(朝鮮史記)』(Corea: The Hemrit Kingdom), 그리고 알렌(Young J. Allen)과 채이강(蔡爾康)의 공저인, 『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남이 옥중에서 읽은 책들은 대체로 청말 중국의 개혁가들, 특히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 등 무술정변(戊戌政變:1898)을 일으켰던 급진적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준 책들이었다. 이로써 미루어 1898년 전후 한국과 중국의 급진 개혁가들은 다 같이 구미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상호간 사상적인 친화성(affinity)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젊은 날의 우남에게 있어서 이처럼 마음껏 독서 할 수 있었던 한성감옥은 대학 중의 대학이었던 것이다. 우남은 옥중 독서를 통하여 성경을 많이 읽고, 위대한 분들의 사상에 접 하였으며 서양의 사상을 자기의 것으로 점차 습득해 나갔던 것이다.

나. 전도활동

이승만의 개종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체포되어 병영과 한성 감옥에서 미결수의 신분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기간, 즉 1899년 1∼2 월경으로 보여 진다. 그 동안 명목적인 기독교인에 불과했던 그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됨으로써 감옥 안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된 우남은, 감옥 안의 죄수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체험하고 만난 예수를 전하는 것은 우남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 이었다. 당시 우남이 수감되었던 시기에 한성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은 미결수가 140여명, 기결수가 205명으로 합하면 345명가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남이 기독교인으로 회개하고 변화하게 됨으로써 그와 함께 옥중에 수감된 많은 죄수들과, 심지어는 감옥의 간수장을 비롯한 직원들까지도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40명 이상의 죄수가 나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쁜 나머지 나는 간수부장에게 내 경험에 관해 이야기했고 감옥을 방문한 그의 동생에게도 이야기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내가 바뀐 사람이 됐다고 말했고, 이 두 사람은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개종했다." (Oliver R. Avison, Memories of life in Korea, p. 90.)

고 한 우남의 진술은 기독교인으로의 회개에 대한 자신의 체험이 담긴 간증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올리버는 우남의 회개로 인해 감옥 안에 일어난 변화를 보다 자세히 기술했다.

"그(이승만)가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면서 실제적인 일들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수용된 사람들은 갖가지 어려운 사정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흉악범도 있었지만 이상주의에 불타고 부패한 군주의 폐해를 일소하려는 진지한 노력 때문에 수감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기독교를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서양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로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승만은 성서를 보면서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도 읽어 주었다.

감옥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에 가장 회의적인 사람들도 그의 성경 낭독을 들었다. 기도는 그에게 영적인 교류를 위한 자연스런 방법이 되었고, 하루의 일과를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가 수감되어 있던 6년 동안 40여명의 죄수들이 그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신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간수부장 이중진(李重鎭)과 그의 동생 이중혁(李重赫)도 있었다." (올리버 (Robert T. Oliver),『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78쪽.)

위의 내용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이할 만 한 점은 현 정부의 체제와 그 시책에 반대한 죄목으로 수감된 죄수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들은 당시 개화파 양반들을 의미하는데 우남과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된 죄수들 가운데에는 이런 양반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개종에 우남이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개종한 양반들 가운데에는 이원긍(李源兢, 1849-1919), 이상재(李商在, 1850-1929), 유성준(兪星濬, 1860-1934), 김정식(金貞植, 1862-1937), 이승인(李承仁), 홍재기(洪在箕, 1855-1908)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거물들이 끼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정치범들이었다. 이들이 옥중에서 개종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보겠지만, 일단 이들은 양반 가운데에서도 고위 관료 출신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원긍(李源兢)의 아들이었던 이능화(李能和)는 그의『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 한성감옥에서 개종했던 대표적인양반들에 대한 이력을 소개한 바 있다. 이를 참고하면 먼저 이원긍은 종이품으로 성균관 대제학을 지냈고, 이상재도 종이품으로 의정부 참찬을 지냈으며, 유성준 역시도 종이품으로 내무협판을 지냈다. 이어서 김정식은 전 경무관이었으며, 이승인은 이상재의 아들로 부여군수를, 그리고 홍재기도 참서관으로 개성군수를 지냈다. 이능화가 언급한 이들의 이름 가운데에는 이승만도 철학박사로 그 이력이 명시돼 있다.

이능화는 위 책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양반들의 이력을 소개하며, 이것이 관리와 양반들 사이에서 기독교 믿음을 갖는 최초의 일이 되었다고 평하였다. 이능화의 말에 따르자면 한성감옥에서의 일부 양반들의 개종은 양반층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양반들 중에는 이들보다 앞서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더러 있었다.

당시에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들은 이수정(李樹廷,1842-1886),서상륜(徐相崙,1848-1926),서재필(徐載弼, 1864-1951), 윤치호(尹致昊, 1865-1945)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개종은 국내가 아닌 일본, 만주, 미국, 중국 등지에서 각각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국내에서 개종을 한 사례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능화의 이러한 지적은 타당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양반들이 옥중에서 개종한 사건을 두고 이정식(李庭植) 박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선비들의 개종이 사회혁명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대부들이 기독교로 접근하는데 국가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높은 사회적 지위는 양반사회에서 기독교를 인정하도록 만들어 주었다는데 있다고 했다. 이정식 박사는 이것을 Legitimize(합법적인) 라는 영어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다른 양반들이 기독교에 들어설 수 있도록 정당화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정식 박사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은 대대로 유교를 숭상하던 나라로 조상의 제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사학(邪學)이라고 엄하게 배척했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역시도 양반 지식인 계층 보다는 하류 계층 선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 사이로 기독교가 파고들기엔 사실상 장애가 많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백낙준(白樂濬)도 지식인 계층의 기독교 개종이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굉장히 유리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선교사나 신입교인(新入敎人)들은 기독교를 타인에게 이해시킬 만한 어학능력이나 교양이 없었기 때문에 전도하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한자 서적을 통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양반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고충(苦衷)들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낙준, 『한국사 (근대 문화의 발생)』20, p. 264.)

이렇게 양반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됨으로써 상류 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기독교가 골고루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초창기 선교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양반들이 개종을 하게 된 배경에 우남이 있었다는 선교사들의 진술 역시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 여겨진다. 다음은『신학월보』에 실린 글 가운데 우남의〈옥중전도〉라는 제목의 글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 그 일부를 싣는다.

"허구한 옥중 생활이 어느덧 6년이 되오니 자연히 인간고초도 많이 겪었거니와 고초 중에서 경력이 생겨 항시 세상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 하나 그렇지 못한 사정이 여러 가지이므로 귀월보(貴月報)를 볼 때마다 침울할 뿐이더니 다행히 오늘 기회가 있기에 옥중 경력의 두 가지 긴요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데 이 두 가지인 즉, 첫째는 깨달음이요, 둘째는 감사한 일이다. (중략) 그 중에 내가 홀로 특별한 기회를 얻어서 외국의 여러 가지 서적을 얻어 진야잠심(盡夜潛心)하며 같이 있는 친구를 권면하여 가르치매 몸 이르는 곳이 스스로 문풍이 생기더라.

다행히 본 간수장 김영선 씨와 차장 이중진씨가 도임한 이후로 감옥도 차차 변하여 진보한 것이 많거니와 총명한 아이들을 교육할 일로 종종 의논하다가 작년 음력 9월에 베로서 각 간에 있는 아이 수 십명을 불러내어 한 간을 치우고 〈가갸거겨〉를 써서 읽히니 혹 웃기도 하고, 혹 흉도 보고 혹 책망하는 자도 있는지라.

좋은 일이 으레 이러한 줄로 아는 고로 여일 일심하여 지금 반년이 못되었는데 국문을 다 알고 보고 쓰며 동국역사(東國歷史)와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워 글씨 쓰기와 뜻 알기에 어려서부터 배운 아이들만 못하지 아니하며 영어와 일어를 각기 자원대로 가르쳐서 성취함이 가장 속히 되었으매 외국교사가 시험하여 보고 대단히 칭찬하였으며, 신학은 가감승제(加減乘除)를 매우 잘하며 지도와 각국의 유명한 일과 착한 행실을 듣고 감화한 표적은 여러 가지 인데 다 말할 수 없으며, 신약(新約)을 여일이 공부하여 조석 기도를 저희 입으로 하고, 찬미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며, 언어 행동이 통히 변하여 새 사람 된 자 여럿이며, 어린 마음이 장래에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이 중 몇 아이뿐 많지 못할지라.

배우기를 원하는 어른이 여럿인 고로 한 칸을 또 치우고 좌우로 나누어 영어와 지리와 문법을 공부하여 성취함이 대단함에 속하니 이는 다 전에 한문과 외국 언어를 연습한 선비들이라, 그 공효에 속함을 이상히 여긴바 아니라 이 어른의 방은 신흥우씨가 거하여 가르치며, 양의종씨가 거하여 가르치는데 공부여가에는 성경말씀과 옳은 도리로 주야(晝夜) 근면(勤勉)하여, 나는 매일 한시를 분하여 두 군데를 가르치매 관계되는 일이 불소하여 자연히 분주하나 성취되어 가는 것이 재미있어 괴로운 줄을 깨닫지 못할지라.

매 토요일은 본서장이 대처에서 직접 도강을 받은 후에 우열을 보아 종이로 상급을 주며 불하는 자는 절로 벌을 행하여 매 주일은 정학하는데 뱅커 목사가 와서 공부한 것을 문답도 하며 성경말씀도 가르치매 그 효험이 더욱 대단한지라.

그 동안 내외 친구들이 연조한 것도 많은 중 제물포 사시는 어떤 친구는 제국신문사로 성명없이 편지를 하고 지폐 이원을 보내서 감옥서 학비를 보태어 아이들의 의복을 고쳐 입히니 참 감사할 만한 일이라. 대강 경장(更張: 묵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이 이러하매 전일에 가르치는 것을 불가하게 여기던 이들이 보고 탄복하여 극력 찬조하나니, 예수 말씀에 병인 있어야 의언이 쓸데 있나니라 하신 뜻을 깨달을지라.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밉게 여겨 물리칠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가르치면 스스로 감회되어 의원이 병인 고친 것 같이 효험이 드러날지니 이것이 나의 깨달은 바이오. (중략) 작년 예수 탄신일에 우리도 다행히 구속하심을 얻은 사람이 되어 기쁜 정성도 측량없거니와 만국 만민의 영광스런 명일을 옥중에서도 처음 경축하는 것이 또한 용이치 않은 기회인 고로, 관원과 죄수들이 우연히 수합한 돈이 뜻밖에 수 백량이 된지라. 다과를 예비하고 관민 사십여 명이 모여 즐거이 경축할 때 그 지낸 예식은 다 말할 수도 없으며, 이날 오전에 뱅커 목사께서 예물을 후히 가져오고 위로 차 오셨다가 모인 아이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매 주일날에 와서 가르치기를 작정하며 관원들이 다 감사히 치사하였으며 서적실을 실시하여 죄수들로 하여금 임의로 책을 얻어 보게 하려 하매,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여 오십원을 위한(기한이나 한도를 정함)하고 보조하기를 허락하여 사백량 돈을 들여 책장을 만들고 각처에 청구하여 서책을 수합하여 심지어 일본과 상해의 외국 교사들의 듣고 서책을 연조한 자 무수한지라.

영서 국문 한문의 모든 서책이 지금 있는 것이 이백오십여 권인데 처음 십오일 동안에 책 본 사람이 이백육십팔인이요, 지난달은 일삭 동안에 통히 이백사십구인이라. 천문, 신학, 경제 등 모든 정치상 관계되는 책이 더 있으면 보는 사람이 더욱 많을 터인데 방금 구하여 오는 책이 불소하다 하는지라 국민이 이만치 유조(도움이 있음) 할일이 없을 듯 하도다.

이 험한 중에서 이 험한 괴질을 겪으며 무사히 부지하여 있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로 하여금 나를 감화시키는 힘을 주시지 아니하였으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세상 죄인들을 감화시키는 교가 아니면 불소한 재정으로 서적실을 졸지에 설치하였을 수 없을지라. 이것이 나의 일인 바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 함이니 이 깨달음과 감사함으로 여일히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새가 깃들이게 될 줄을 믿겠나이다.』" (신학월보, 「옥중 전도」 光武 7年 3月.) <계속>

※ 지면 관계 상 일부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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