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왈츠왈더는 이 글에서 “나는 한때 고등 교육을 받은 친구와 도덕의 기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게 많은 무신론자들이 윤리적이고 명예롭고 도덕적이라고 말했다”며 “나는 동의했지만 우리에게 도덕적 의지를 계시하신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그 순간 느끼는 것대로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놀라워하며 “만약 신이 없다면 도덕적인 것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군요”라고 말했다는 그는 “내 친구는 궁극의 도덕적 입법자가 없는 경우에만 일련의 윤리적 기준이 객관적으로 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슈왈츠왈더는 “1944년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96%가 신을 믿었다. 오늘날 그 비율은 약 80%를 유지하고 있다. 이 통계는 미국인들이 어떤 종류의 신을 믿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며 “우리(미국) 역사에서 한때 실질적인 대다수가 신을 성경에 묘사된 분으로 식별했지만, 신비주의, 오컬트, 동양 종교, 그리고 사실상 개인적 선호에 기초해 신앙을 스스로 창조한 시대에는, 이것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종교적 믿음의 이러한 거대한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우려스럽다. 하나님이 주관적인 욕망에 의해 정의되거나 똑같이 입맛에 맞는 종교적 선택의 뷔페에서 선택된 유연한 개념이라면, 그분과 우리 삶의 상호 작용은 권위적이기보다는 대체로 치료적”이라며 “도덕성은 타협할 수 있으며, 그것은 삶의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것을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고 했다.
슈왈츠왈더는 “우리가 왜 사회적 모순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트랜스젠더리즘에서 종교 자유의 억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살 권리에 반대하는 극단적인 자율성(임의 낙태)에 이르기까지 한때 공통된 도덕 언어는 이제 바벨탑의 혼란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물음을 던진 그는 ”첫째, 우리는 성경의 명령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규례를 행해야 한다”며 “타락한 세상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항상 반문화적이며 결과적으로 우리를 돋보이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럴 경우 “왜 그렇게 사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는 “이런 종류의 질문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호기심만큼이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사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나눌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이생의 희망과 영생의 확신이 모두 필요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이어 “둘째, 우리는 듣고 질문함으로써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문제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내면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며 “기꺼이 들을 때 우리는 말할 권리를 얻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거룩함을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슈왈츠왈더는는 “이것은 멋지고 깔끔한 공식이 아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대화나 관계가 끝날 수 있다”며 “그러나 그것 때문에 멈출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것을 계속 보여줄 때 가장 저항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친절과 헌신 뒤에 진정한 무언가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셋째, 우리는 공공의 광장에서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주장함으로써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법률을 통해 생명, 종교의 자유, 가족, 건전한 성 윤리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정부 정책을 통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증거할 수 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는 또한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로마서 2:15)인 양심에 호소할 수 있다”며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좌파조차도 자녀를 사랑하고 교통 법규를 준수한다. 우리의 호소가 묵살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혼 깊은 곳으로 파고들지도 모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