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주기철 목사는 1923년 봄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시절 경남노회 양산읍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1925년 12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 당회장을 역임하였고 1932-33년 경남노회장으로 사역했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하여 예배당을 신축했고 1937-38년 평양노회 부노회장에 선임되었으나 신사참배 반대입장을 굽히지 않아 평양경찰서에 구금된 상태에서 1940년 3월 평양노회로부터 목사직 제명 처분을 받았다. 가족까지 목사 사택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주기철 목사는 홀로 외롭게 투쟁하다가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했다.
기독교 역사학자 이덕주 교수(저자)는 지금까지 주기철 목사와 관련된 자료, 순교 전 간행된 신문과 잡지들을 찾아내 총 19편의 원사료들을 발견했다. 그는 올해 주기철 목사 성역 100주년을 맞이해 20년 전 출간된 첫 책을 새롭게 전면 개편하여 본 도서를 출간하게 되었다. 이전 저서에서 주력했던 사료 비평과 선행 연구에 대한 비평을 빼고, 그사이 새로 발견된 자료 특히 총독부나 일본 정부에서 간행했던 비밀보고서나 일반 언론지에 실렸던 관련 기사들을 참조하여 내용을 보완했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던 원사료들의 일부를 본문에 인용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주기철은 나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했고 이별을 슬퍼했다. 다만 그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훼절의 길을 갈 때 차마 사랑하는 그분을 배반할 수 없어 그분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노력했고, 그분이 그런 그를 도왔다. 그 결과는 그분처럼 십자가 순교였다. 태어날 때부터 순교와 완덕을 이룰 인물로 점지된 자는 없다. 모두 부족한 인간일 뿐이다. 다만 매순간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그분의 뒤를 따르려는 의지만 갖고 노력하면 순교자도 되고 완덕 성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순교나 완덕은 신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선물일 뿐이다”고 했다.
이어 “주기철 목사는 목회를 ‘전쟁’으로 보았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치러야 할 전쟁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세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향한 것이다. ‘교인 죽이기’가 아니라 ‘자기 죽이기’로 목회하라는 충고였다. 그런 의미에서 ‘죽을힘을 다하라’는 그의 말은 ‘끝까지 죽어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나 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했던 고백이 그러했다. 주기철 목사에게 목회는 ‘육을 죽여 영을 살리는’ 죽음 체험의 연속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런 설교와 권면을 한 2년 후 신사참배로 인한 고난과 죽음이 앞서 기다리는 평양으로 목회지를 옮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고 종교의식이 아니다’는 총독부 논리로 교인들을 설득하려는 교회 지도자와 목회자들을 향해 ‘모독배’(冒瀆輩)란 칭호를 쓰며 경고하였다. 그런 그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맹인 된 인도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이란 칭호를 써가며 종교 지도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마 23:15-36).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 한 그 어떤 타협도, 양보도 거부하였다”며 “고문과 악형으로 이어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차라리 축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타협해서 살기보다는 신앙 양심을 지키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을 보여주기를 소원했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주영진 전도사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갔다. 그는 주기철 목사로부터 부와 명예, 안락 대신 가난과 고난 목회, 그리고 순교를 세습(世襲)하였다. 주영진 전도사 가족의 고난은 가장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영진 전도사 유가족은 월남하지 않고 긴재교회 사택에 머물러 살았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10월 평양 수복 때 긴재교회 출신 최병문 장로가 긴재교회를 찾아갔을 때 그는 주영진 전도사 부인이 두 아이와 시할머니(주기철 목사의 어머니)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주광조 장로는 일본을 통해 입수한 자료를 통해 ‘주영진 전도사의 아내 김덕성 역시 ‘당과 정부 정책과 반국가적 선전행위를 감행’한 혐의로 1970년 10월 26일 체포되어 1971년 1월 15일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게 해서 대를 이은 목회자 부부의 십자가 사랑, ‘순교역정’(殉敎歷程) 이야기는 완성되었다”고 했다.
한편, 이덕주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한국교회사와 아시아교회사를 강의하였고, 2018년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성경 쓰기와 걷기 묵상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부탁받은 강연과 글쓰기에 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간 주기철>, <다시 근원으로>, <이덕주의 산상팔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