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아들에 대한 사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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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4. 성경의 사례: 므비보셋

최더함 박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예화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다윗과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우정과 사랑은 지극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슬퍼하며 그 유명한 ‘활의 노래’(삼하 1:19~23)를 지어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 애가는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26절을 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요나단을 사랑했던 다윗은 신하들에게 그의 가문 중에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의 아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바로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은 즉시로 군사를 보내어 그를 찾게 하였고 마침내 므비보셋이 숨은 장소를 찾아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의 군사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를 보호하고 있던 한 여인이 느꼈을 공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언제 다윗왕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므비보셋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던 이 여인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여차하면 자기 목숨을 끊어낼 준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므비모셋은 다윗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순간 므비보셋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잔인하게 살해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장의 자손을 살려두는 법은 없으니까요. 결국 사로잡힌 므비보셋은 다윗 앞으로 갔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 9:6~11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모셋이여 하나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왼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모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 므비모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은 왕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한두 번에 걸친 식사가 아니라 항상 함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므비모셋이 다윗의 아들처럼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화는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므비보셋이 누린 특권을 생각하며 먹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지금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제공되는 떡과 포도주는 아버지께서 특별하게 아들에게만 주시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므비모셋이 왕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므비모셋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다윗은 그를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요나단에 대한 사랑 때문에 므비보셋이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성부가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가족이 되어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특권을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며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부를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정말로 사도 요한이 권면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5. 결어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게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꾸로 세상에 대해선 낯선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과는 이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미움과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간혹 타협을 시도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세상의 배척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관심과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싶어서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선포하는 일을 꺼려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런 방식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합리화하면서 복음의 소리를 닫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만 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관계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좋은 친구는 좋은 일은 물론이고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친구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즐겨야 합니다. 단맛만 찾아다니며 힘든 일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 살아야 합니다.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양자교리가 주는 특별한 교훈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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