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것만 구하는 기도
질문하신 정황을 살펴볼 때에 신학생들이 그런 맹신적 신비주의에 빠져서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니까 교수가 문제 삼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기복주의의 기도와 기복적인 기도로 구분해서 접근하고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34)
이방인들은 인생의 목표를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둡니다.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자신의 안락을 도모하는 방향으로만 일관되게 작동합니다. 그들의 신(神- 사실은 우상에 불과하지만)들도 신자들의 현실적 형통만 보장해주는 역할만 합니다. 결국 세상의 것만 풍성해지는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말씀이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복주의가 기독교 안에서도 성행하며 최근에는 대다수 교회들이 표방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도 하나님께 현실의 복을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합니다.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해선 안 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으며, 지금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먹고 마실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서가 아니라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두라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다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세상의 것을” - “세상의 것만”이 아니라 -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자기 계획과 소원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신경을 써야할 측면은 “자기 계획과 소원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포함되느냐?”이지, “세상의 구할 것을 구해선 안 된다.”가 아닙니다.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 안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일상적인 현실 문제가 신자에게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신자가 세상에서 정말로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거룩하고도 즐겁게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다. 신자가 일생 동안 가난하고 궁핍하며 병에 걸려 고생하고 손해만 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신자가 한 숨 짓고 울면 하나님은 더 크게 한 숨 짓고 더 슬프게 우십니다. 그분은 신자가 세상에서 권력 명예 지상주의로 사는 것은 아주 싫어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소유와 염세도피주의로 사는 것도 매우 싫어합니다.
종교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
문제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구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가 세상의 것이며 어디부터 하나님의 것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목사님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 또한 종교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도덕적 종교적 모습만 띄면, 아니 꼭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것만”, 아니면 최우선적으로, 강조합니다. 신자가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의로워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신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죄의 본성이 살아있어서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말입니다. 비유컨대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학교에 출석하지 않으면 학생이 아니지만, 학교에 열심히 출석하면 성적에 상관없이 학생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란 간단히 말해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는 물론, 신자가 속한 어떤 공동체에도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통치가 임하여 그분의 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신자의 삶을 통해서 주위 모두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상적인 직업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됩니다. 모두가 선교사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세속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고 그분의 의가 드러나는 모습을 주위에 실제로 보여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가 교회 안에만 묶여 있으면 아무리 경건해도 종교적인 것이며, 교회 밖에서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적더라도 자신을 통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면 신앙적인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로 인도하라는 것만이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은 신자가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서 그 섬김은 받은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그분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자신이 하는 세상 일을 통해서 그런 모습이 이뤄지면 신앙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런 목적이 이뤄지는데 분명 도움 되는 일을 아무 사심 없이 준행하겠다면 백억을 달라고 기도해도 신령한 기도입니다. 반면에 이웃이 예수를 알고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일으켜 세워지는 목적이라곤 하나 없이 순전히 자신의 영달과 형통을 위해서만 빈다면 단지 십만 원만 달라고 해도 기복주의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신자에게는 주의(主義)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 하나님 외에 어디에도 적용되어선 안 됩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오직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세상 앞에 드러내는 일관된 한 방향으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신자를 통해 주님의 은혜와 권능이 이웃으로 번져나가서 그가 속한 공동체를 거룩하게 바꾸는 것이 모든 신자의 평생의 소명이어야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에는 주의(主義)는 붙일 수 없고 적(的)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신비적인 것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지만, “도깨비 방망이 뚝딱!” 식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신비주의 기도가 되어선 안 됩니다. 또 현실 문제가 신자에게도 중요하기에 기복적인 기도는 할 수 있지만, 현실의 형통만을 목표로 하는 기복주의가 되어선 안 됩니다. 초자연적 은사나 체험을 소망해도 되지만, 초자연주의나 은사주의나 체험주의로 흐르면 잘못입니다.
원칙적으로 신자의 모든 기도는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이 예수중심주의로 완전히 바뀐 바탕에서 해야 합니다. 비록 스스로의 생각으로 소망하고 계획하는 일이라도 그 최종목적과 열매가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가 높아지는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러면 그 내용과 방식과 언어와 상관없이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원리를 모르거나, 알아도 잊어먹는 것이 예사인지라 신자는 무엇이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신자가 자기 정욕만을 구한 것이 아니라면, 신자의 평생에 걸친 기도를 비롯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성령님이 신자더러 예수중심주의로 살고 기도하도록 깨우쳐주고 바로 세워 줍니다. (끝)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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