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협치 부재, 정치 실종의 피해자는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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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4일 민주당이 통과시킨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재의 요구권을 행사했다.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법이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자,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는 게 이유다.

국회가 통과시킨 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건 박근혜 대통령 이후 약 7년 만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5월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법안을 통과시킨 민주당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재의결로 무력화시키겠다며 반발하는 모양새나 대통령이 거부할 것을 알고도 불합리한 법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야당에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전량 매입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려면 매년 1조원 이상의 국가 예산을 쌀을 사는데 쏟아부어야 한다. 정부가 남아도는 쌀을 사들이면 농민은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농업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고 연쇄적으로 쌀값 하락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손해다. 40여 개 농민 단체가 반대하는 이유다.

우리 국민의 식생활 변화로 쌀 소비량은 계속 줄고 대신 밀가루·육류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 소비가 주는 데 그걸 국가가 다 책임질 순 없다.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고 대책을 내놓을 순 있어도 그걸 법으로 강제하면 다른 작물의 공급과잉이 생겨도 똑같이 해야 하는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시장경제 원리라면 쌀 경작 면적을 줄이는 게 최선이다.

남아도는 쌀을 국가가 사들이는 데 따른 혈세 낭비는 보관비용과 물류비용 등 2차 3차, 손실로 이어져 국민의 세 부담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쌀을 사들이기보다 작물 전환, 첨단화, 특화 등에 지원하는 게 장기적으로 농민을 돕는 길이다.

민주당은 이 법을 밀어붙이면서 난데없이 ‘식량 안보론’을 꺼냈다. 지금 지구상에 식량을 안보로 삼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국산 쌀보다 훨씬 저렴한 수입쌀의 유입을 정부가 통제하는 건 우리 농민의 피해를 막으려는 것이지 쌀을 무기화하자는 게 아니다.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라고 하는 요즘 세대엔 통하지 않는 논리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이 법을 추진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정부가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면 쌀 공급과잉과 정부 의존도가 커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거대 여당이던 민주당이 그때는 말도 꺼내지 않다가 야당이 되고 나서 밀어붙이니 “전형적인 표플리즘”이란 소리가 나오는 거다.

야당이 이 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리란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러면서도 무리하게 법안을 밀어붙인 속셈이 뭐겠나. 우리는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이렇게 애쓰는 데 대통령과 여당이 훼방을 논다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기에 이보다 좋은 구실이 없기 때문이다.

걱정은 민주당이 이런 입법 폭주를 내년 총선 때까지 지속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민생보다는 정치적 이슈에 민감한 ‘노란봉투법’, ‘방송법 개정안’, ‘간호법’ 등도 줄줄이 밀어붙일 태세다.

그런 법들이 국민을 위해 꼭 필요하다면 하등에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작정하고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려는 속셈이면 문제가 있다. 윤 대통령의 독선·불통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켜 다음 총선에서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치밀한 계산에 국민이 얼마나 맞장구쳐줄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출당 조치한 무소속 윤미향 의원을 상임위 안건조정위에 끌어들이는 꼼수를 썼다.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리자 윤 의원을 동원해 본회의에 직 회부하는 무리수까지 감행했다. 국회의원들이 적법한 절차 대신 꼼수를 밥 먹듯 하는 것도 문제지만 여야 간 제대로 된 토론조차 없이 본회에 법안을 상정한 건 본질적 하자에 속한다.

그래놓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의결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재의 요구된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려면 재적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한다. 여당의 반대로 안 될 줄 알면서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게 무얼 의미하나.

반시장적인 불합리한 법안을 힘으로 밀어붙인 민주당은 야당이지만 여당을 경험한 원내 제1당이다. 그런 막강한 힘과 경험을 정치가 아닌 정략에 소비하면 국민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농민을 위한다면서 농민을 사지로 내모는 법안은 스스로 거두는데 마땅하다.

그런데 민주당만 탓할 수도 없다. 협치 없는 정치는 강대강 ‘양육강식’의 대결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국회가 딱 그런 모습이다. 야당이 힘으로 밀어붙일 때마다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막아설 것인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국민을 위한 것이지 아무런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여당의 보호막용이 아니다. 정부 여당은 대통령의 거부권 뒤에 숨지 말고 이제라도 농민의 애타는 목소리를 경청하고 대책 마련을 서두르기 바란다.

‘협치 부재’의 최종 피해자는 국민이다. 시급한 민생 현안이 매번 뒷전으로 밀리는 이런 정치 실종을 국민이 언제까지 봐 줘야 하나. 여야는 당장 처리가 시급한 민생 법안부터 차근차근 처리해 나감으로써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한다. 국민의 매서운 회초리가 가해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