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덕성 교수가 지난 3월 9일 서울 안암제일교회에서 ‘챗GPT 시대와 기독교회’라는 주제로 열렸던 개혁신학포럼 정기세미나에서 발표한 글 ‘챗GPT와 신학교육’을 두 번에 걸쳐 게재합니다.
1. 즉답인공지능
인류는 즉답인공지능 ChatGPT(Chat Generated Pre-trained Transformer, 사전 훈련된 생성 변환기) 시대로 진입했다. 시간이 갈수록 인공지능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즉답인공지능은 신학교육과 목회현장를 포함한 인간의 거의 모든 영역에 요긴한 정보를 제공한다. 역사·과학·철학·법률·종교 등 거의 모든 영역에 필요한 무궁무진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공지능은 법정 판사의 정확한 판단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변호사와 검사가 정보를 입력하고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결과를 내게 한다. 판사는 인공지능의 판단 과정과 귀결의 정확도를 감시하고 그것의 결론을 참고하면 적중도가 높은 판결을 할 수 있다.
브니엘신학교 졸업식 설교에 참고할 목적으로 ChatGPT에게 마태복음 9장 9절을 본문으로 주고 ‘소명’(Calling of God)이라는 주제의 설교문을 작성하라고 했다. 약 15초 만에 A4 용지 한 장 분량의 괜찮은 설교문을 내놓았다.
설교문이 너무 짧아 5,000자짜리 설교를 만들라고 했다. ChatGPT는 정중한 조언을 했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 길이의 설교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너무 깁니다. 5,000자 설교는 전달에 1시간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의력 집중 길이 보다 훨씬 깁니다. 설교는 간결하고 집중적이어야 메시지가 청중에게 강력한 영향(impact)을 줄 수 있습니다.”
ChatGPT에게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교육, 헌신, 인격적인 성장의 조화, 그리고 필요한 지식, 기술, 관점을 함양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⑴ 정규적인 교육을 이수하라. ⑵ 폭넓은 독서에 매진하라. ⑶ 언어들(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을 배우라. ⑷ 신학적 논의에 참여하라. ⑸ 쓰기와 말하기의 기술을 배양하라. ⑹ 자신의 믿음을 성찰하라. ⑺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소유하라“고 했다.
ChatGPT의 역량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것이 작성한 대학 과정의 리포트라면 평균 B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술이 좀 더 향상되면 석사학위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을 대필할 수도 있다. 신학 분야의 논술문, 학술 에세이, 단답형 답안 작성도 할 수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로스쿨과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의 졸업 시험, 미국 의사면허 시험까지 통과할 만큼 성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지능이 높은 사람이 쓴 글과 차이가 없거나 더 탁월한 답을 제공할 수 있다.
인류는 즉답인공지능 ChatGPT 시대에 진입했다. 이것은 초연결망정보전달시스템(인터넷), 유비쿼터스, 메타버스와 더불어 교육계에 강력하게 도전한다. 이것을 적극 활용하는 자가 각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G. Carr)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초연결망(인터넷) 등장과 함께 인류의 사고 능력이 퇴화하는 슬픈 현실을 지적한다(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최지향 역, 서울: 청림출판, 2011).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뇌의 구조와 사고능력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생각하는 기술 능력이 퇴화하고 있다고 한다.
신학교육 종사자들은 카의 지적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인터넷의 일상화와 더불어 신학도들의 읽기, 쓰기, 말하기, 비평하기, 질문하기, 자기 생각 만들어 내기 등의 능력이 점차 퇴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신학교육은 단순암기와 단순 정보전달 방식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익히고, 성경구절을 외우고, 신학용어와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습득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그러나 신학교육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분석, 비평, 종합, 창의적 재생산 능력의 함양이다(최덕성,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서울: 지식산업사, 2013)을 보라). 신학교육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독자적인 연구능력이다. 홀로 강의안과 설교문을 만들어 가르치고 감동적일 설교를 할 수 있는 실력 그리고 사색, 상상, 논리, 창의성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글쓰기와 직결되어 있다.
ChatGPT가 신학교육에 역설적으로 또는 반어법적으로 기여하고 교훈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신학 고유의 역량 곧 분석, 비판, 종합, 창의적 적용 능력의 중요성이다. 둘째, 자기 나름의 논리와 창의적 사고능력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정보전달과 암기 중심의 교육 수준에 머물 수 없음을 알려 준다. 셋째, 교육 방식과 학점 평가방식의 전환을 재촉한다. 신학교수는 이전보다 더 무거운 감독과 학습 지도의 짐을 지게 되었다. 넷째, 신학도의 글쓰기 곧 논술문 또는 학술 에세이 쓰기 능력의 필요성이다. ChatGPT가 기승을 부릴수록 비판적 사고능력, 창의적 사고력, 정보판별 능력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2. 고민
즉답인공지능 ChatGPT의 등장으로 일반 대학 교수와 마찬가지로 신학교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일부 학교들은 즉답인공지능 사용을 금지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저작물 윤리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ChatGPT를 활용해 작성한 텍스트는 인공지능표절(AIgiarism, AI+plagiarism)에 해당한다. 타인이 작성한 텍스트를 자기가 한 것처럼 속이는 행위이다. ChatGPT는 첨단 표절 기술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언어 데이터의 문자들과 규칙성에 기반하여 대필을 한다.
둘째, 인공지능의 필수 구조인 환각(hallucination)은 학업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환각’은 정확하지 않은 오류 데이터까지 정답으로 학습하여 그것을 정답처럼 내놓는 작동방식이다. 현재의 ChatGPT는 2021년까지 생산된 영어 데이터만을 학습한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문재인’이라고 답한다. ChatGPT는 전거(典據)나 출처를 밝히지 않으므로, 오류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학습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ChatGPT가 작성한 텍스트를 판별하는 새로운 기술은 즉답인공지능을 이용한 글을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방편이거나 무용지물이다. 우회 접속과 학교 밖 사용을 막을 수 없다. 즉답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를 조금만 수정하면 텍스트 판별 프로그램이 잡아내지 못한다.
ChatGPT를 학습저해 요인으로 여겨 사용을 규제하면 인류의 거대한 변화와 혁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게 된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즉답인공지능의 폐해와 독소를 인지하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디지털해독능력(digital literacy) 구축은 현대인의 삶의 필수요건이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는 ‘살인 기계’로 불렸다. 면허, 도로, 신호체계 등을 고안 보완한 뒤에는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바뀌었다. 즉답인공지능 ChatGPT는 문자의 첫 출현만큼이나 경쟁력과 탁월성을 가진 기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수행과 세계복음화에 요긴하게 이바지할 수 있다.
3. 신학교육과 글쓰기
글쓰기는 사고능력을 배양하는 학습 활동이다. 신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육은 글쓰기에서 글쓰기로 이어진다. 입학 논술시험에서 졸업 과제인 석사학위 논문까지, 매 과목마다 글쓰기 과제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글쓰기의 순기능 때문이다.
글쓰기는 개인이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엮어 문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비평적 사고, 논리적 사고, 창의적 사고의 종합이다. 강의를 듣고 학습한 지식, 이해, 정보들이 논리적 사고능력과 더불어 글쓰기에서 종합된다.
글은 사고의 거울인 말의 시각적인 기록이다. 독서는 이 기록을 사고 속으로 회수하기 위한 수단이다. 글을 읽음은 종이에 쏟아진 글쓴이의 사고를 독자가 자기의 머리에 담는 작업이다. 글쓰기는 필자의 생각을 공리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활동이다. 글은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가장 두드러진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인류문명의 발전을 견인해온 창의적 이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의 목회와 신학 작업에는 암기력이나 지식 또는 정보의 양보다 분석, 비판, 종합, 창의적 적용으로 이어지는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 능력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목회현장은 신학도를 ‘생각하는 존재’로 훈련시킬 것을 요청한다.
컴퓨터, 빅데이터, 즉답인공지능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길러낸다. ‘비판적 사고능력’ 곧 ‘생각하기 기술’은 ChatGPT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생각하기’ 영역의 결실이 아니다. ChatGPT는 ‘암기-학습하기’ 구조의 결과이다. 기계학습에 의한 축적된 데이터를 정리하여 내놓는다. 인터넷 공간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을 치밀하게 짜깁기 하는 수준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각을 온전히 읽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4. 학문의 총아
학(學: science)이란 자연, 인문, 사회의 여러 법칙을 깊이 탐구하며 밝혀내는 지적인 활동이다. 과학이란 역사적으로 생성된 지식, 객관적 또는 상대적 진리를 담고 있는 자연, 사유(思惟), 사회에 관한 지식 체계이다. 이러한 지식 체계는 개념, 명제(특히 법칙적 명제), 이론, 가설의 형태로 정착된다. 학은 자연의 여러 현상과 사유와 사회의 여러 법칙들을 파악하여 체계적 형태로 전달하는 작업이다. 대학교란 큰 배움터인 동시에 과학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어떤 주장이 건전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정당화하는 것은 논리적 형식 덕분이다. 인간은 이 과학적 지식에 힘입어 자연, 사유, 사회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해 나간다. 이처럼 과학적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하고 소화하는 것은 창조적인 정신활동이며 지적인 노동이다.
학은 일정한 공리 체계(axiomatic system)로 수행된다. 공리 체계란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명제와 공리 따위를 체계화한 집합이다. 이 명제들로부터 그 영역의 다른 명제들이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공리 체계는 무모순성(consistency)을 충족시킨다. 과학적 수법(手法)의 총체적 표현인 논문쓰기는 바로 이 공리 체계에 바탕을 둔다. 어떤 착상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유형별로 분석하고, 비평하며,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그 결과를 체계화하여 독자를 설득시키는 작업이다. 자료, 데이터, 사실들을 수집하여 그 현상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다시 종합하면서 보편적인 특징을 찾아내고 그것을 조리 있게 엮으며 주장하고 전달한다.
논문쓰기, 학술 에세이 쓰기는 학문의 총아이다.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관찰, 비교, 분석, 종합하고 그 가운데서 일정한 법칙이나 패턴을 찾아내며 일반화하고 유추한다.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비평 활동을 수반하고 그러한 능력을 키운다.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고 정보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 체계화하며, 논리적으로 판별하고, 상호관계를 따져 옳고 그름을 가리고, 무엇을 예측하거나 구상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재창조 능력을 키운다. 고급 인지 능력을 극대화한다.
과학적인 수법은 학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변호사의 논고도 과학적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의뢰인을 대신하여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종합하고, 명백한 이론과 증거들을 가지고 변론을 편다. 그 논증은 치밀하고 조직적이다. 설교자의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는 경건한 감정을 조성하고 맹목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상식만을 외치는 자가 아니다. 신학의 전제와 목회 원리들을 가지고 탐험자같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성경본문과 목회현장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며 보화를 찾아낸다. 헤르메스처럼 신의 계획과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 본문과 현장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하는 봉사자이다. 열린 마음, 지적 욕망, 수용성을 가지고 탐험한 결과를 불붙는 논리로 토해 낸다. 상담, 교육, 전도, 행정 등의 목회활동 그 어느 것 하나도 인문과학의 방법적인 지식과 과학적 기술(skill)을 요구하지 않는 영역이 없다.
학문연구는 지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요리를 할 수 있는 도구를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좋은 재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도구가 없거나 요리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수 없다.
학문을 하는 자가 생각, 사상을 말이나 글로 조리 있게 표현할 줄 모르거나 요리하고 응용하는 기술을 지니지 못하면 창의성 있는 학문 활동을 해 나갈 수 없다. 인문교육의 최대의 목표는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선명하게 표현하는 능력과 기술 연마이다. 이런 점에서 논문쓰기, 학술에세이 쓰기는 학문의 총아인 동시에 하나의 예술(art)이다.
성공적인 본문생산, 논문쓰기는 일정한 노력을 거쳐 습득되는 노련한 기술(craft)이다. 예술적인 능력과 기술은 하루아침에 습득되지 않는다. 아낙네가 베 짜는 기술을 익히듯, 음악도가 피아노, 플루트, 거문고를 연습하듯, 일정한 시간, 에너지, 노력을 투자하면서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출생 때부터 기술이나 사고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학자는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두뇌를 가진 자가 아니다.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는 일정한 훈련을 거쳐 얻어지는 열매이다. (계속)
#최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