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박사)가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소재 유나이티드문화재단 지하 1층 더글라스홀에서 ‘이눌서(Reynolds) 선교사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세 번째 ‘선교사 사역 탐구 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민영진 박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가 ‘이눌서 선교사의 성경번역에 대한 기여’ △이상규 박사(백석대 석좌교수)가 ‘이눌서 선교사: 한국선교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이상웅 박사(총신대 신대원 교수)가 ‘이눌서 선교사의 생애와 신론 연구’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먼저, 민영진 박사는 “이눌서 선교사(1867~1951)의 본명은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로 ‘이눌서’는 한국 이름이다. 이눌서 선교사는 1892년 11월 3일에 한국에 입국했다”며 “성경번역자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43년(1893~1936) 동안 성경 번역에 참여했고, 성경의 어느 특정 책들을 번역했다기보다 성경전서 66권의 최종 마무리 역할을 했고, 기능적으로 번역자·검토자·편집자·번역상담자·번역조정역·출판담당·후진양성 등 다양한 기능을 맡았다”고 소개했다.
이어 “1911년에 나온 ‘성경전서’는 물론 1938년에 나온 ‘성경개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성경 번역에 가장 오랫동안 헌신한 장로교 선교사”라며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우리말 최초의 ‘성경사전’을 편집하여 출판한 사람이다. 우리말도 잘했고, 우리말 문장도 수려했다”고 했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이눌서의 기여로는 먼저, 영구성서공회 편집소위원회 회의록(1936년 9월 4일)에는 ‘우리는 레이놀즈 박사에게 막대한 빛을 졌다. 초역, 혹은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을 수정한 성경의 모든 책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기 때문이다. 게일 박사가 번역한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현재 사용 중인 구약전서의 대부분을 그가 번역했다. 레이놀즈 박사는 매우 정확한 학자이며 그의 한국어 지식은 어느 외국인의 추종을 불허한다’라고 되어 있다”고 했다.
아울러 “두 번째로 한국지부 성서공회 총무 밀러가 영국성서공회 편집위원장 스미스에게 보낸 편지(1936년 10월 28일)에서 ‘그는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구약의 모든 책의 번역을 책임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개역 작업이 끝나면 구약전서와 신약전서 전체를 또 다시 검토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작업을 위해 두 명의 한국인 학자를 그에게 지원했다… 그는 가장 정확하고 폭넓은 한국어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 번역과 개역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 그는 미국 남부의 고상한 예의를 갖춘 기독교 신사다’라고 기록했다”고 했다.
이어서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이상규 박사는 “한국 이름 이눌서로 알려진 레이놀즈 2세는 부인 볼링(Patsy bolling, 1868~1962)과 함께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로, 1892년 11월 내한하여 1937년 6월 한국에서 은퇴하기까지 45년간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사역한 최장기 선교사였다”고 했다.
또 “이눌서는 내한 이후 서울, 전주, 목포, 평양 등지에서 개척전도·문서사역·성경번역·신학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사역하였고, 한국에서 4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그의 둘째 아들 존 볼링(John Bolling 1894~1970) 또한 한국 선교사로 10년간(1920~1930) 활동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눌서 선교사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먼저, 호남지방 교회 개척과 복음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고, 둘째로 한국교회 치리회 형성과 연합운동에 기여, 셋째로 한국어 성경 번역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여 성경번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는 것”이라며 “넷째로 신학교육과 한국교회 신학형성에 영향을 끼쳤는데, 한국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첫 인물이었다. 다섯째로 한국교회 문서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이런 일련의 활동이 한국교회의 건실한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70세 정년을 맞아 1937년 고향으로 돌아간 이눌서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1년 8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불랙마운틴의 마운틴 뷰(Mountain view) 공원묘지에 묻혔다”며 “그의 부인 팻시 볼링은 막내 딸 엘라(Ella Tinsley)의 집에서 거주하던 중 1962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차남 레이놀즈 3세는 1894년 8월 20일 한국에 태어났으나 중국의 선교학교에서 수학하고, 미국으로 가 아버지가 공부한 햄턴 시드니대학에서 공부하고, 뉴욕의 비브리칼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20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전주 신흥학교와 광주 숭일학교 등에서 10년간 가르쳤고, 193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그는 뉴욕시립대학에서 수리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1956년 은퇴한 후 1970년 3월 20일 75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도 한국에서 사망한 형과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고 했다.
이어 마지막 세 번째로 발제를 한 이상웅 박사는 “이눌서 선교사의 「신학공과」(1916)를 보면 불과 90쪽 분량의 소책자로, 20쪽은 성경관을 다루고, 나머지 70쪽에서 신론을 다루고 있다” 며 “이눌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소요리문답 4문답을 중시하여 출발점으로 삼았고, 삼위일체, 예정, 창조, 섭리 그리고 천사와 마귀 등에 대해 요목들을 제시해 주었다”고 했다.
또 “소책자로 된 공과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논증이나 교리사적인 논의가 거의 없고, 해당 주제의 요목들을 제시하고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거나 때때로 소요리문답 해당 항목을 지시함으로 찾아보면서 공부하도록 구성되어 있다”며 “공과(工課)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책자는 전문적인 신학교과서로 의도된 서적은 아니다. 그가 이 공과를 출간했던 1916년은 한국선교 31주년이고 평양신학교 설립 후 15년이 되던 무렵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눌서는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바른 성경적 교리 교육이 필요한 한국교회 직분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본 공과를 출간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비교를 위해 유사한 교재를 찾아 보면 루이스 벌코프의 「개혁파 신학 편람」, 헤르만 바빙크의 「기독교 교육 편람」을 고려해 보면 합당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비록 전문적인 신학교재로서 신론은 그의 후임인 구례인 선교사나 그의 동료였던 박형룡 박사 때에 출간 되어질 것이지만, 이눌서는 선교 초기 상황에서 성경적인 교리의 요목들을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하여 신학교육뿐 아니라 교계 지도자들의 교리 교육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편, 세미나는 이후 오덕교 박사의 최종발언과 마침기도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