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정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1)

오피니언·칼럼
기고
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김영한 박사

나사렛 예수는 가장 비정치적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출생 시부터 정치적인 위협을 받았다. 예수의 부모는 유대 왕 헤롯의 영아(嬰兒) 살해 기도(企圖)를 모면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을 몰래 떠나 이집트로 도피하였다. 예수 부모는 헤롯이 죽은 후에 ㅇ들 예수를 데리고 유대로 되돌아와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이라는 변두리 작은 마을에서 은둔하여 살았다. 나사렛 예수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셔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사역을 할 때는 권력자들의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는 나중에 메시아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선동자”라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십자가 죽음의 형을 받고 그의 삶을 마감했다.

예수가 정치적인 권력과 잠재적인 갈등을 일으킨 것은 그의 비정치적인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교한 하나님 나라 복음 때문이다. 예수가 증거한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tou/ qeou/, Kingdom of God)의 복음은 전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었으나 자칫하면 세상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이 세상 질서를 초월해 있기는 하나 이 세상 속으로 종말론적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해 있으나 이 세상 속에서 영적인 실재로서 누룩같이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 때문에 예수는 그의 공생애 활동 기간 중에도 유다 헤롯 왕, 로마의 식민 통치자들에 의해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예수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정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올라가 복음을 전한다. 예수는 여기서 체포되어 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요19;2)이 씌어지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19;21)라는 정치적인 죄패를 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I. 탄생과 정치적 박해

1. 예수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 났다.

예수는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 때 동방에서 하늘의 별들을 연구하는 박사들이 도착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음으로써 유다 왕 헤롯을 놀라게 하였다.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마 2:1-3). 예수는 탄생 시(時)부터 자신의 출생이 지닌 메시아적 성격 때문에 헤롯 왕가를 놀라게 하였고, 세상을 진동시켰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비천한 목수 가정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출생했으나, 별을 인도함을 따라 온 동방의 박사들은 그를 유대의 왕으로 간주하고 경배하러 왔기 때문이다.

2. 헤롯은 스스로 위협을 느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단순한 위인(偉人)의 출생을 넘어섰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경배하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놀라서 소동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온 박사들로 인하여 예수의 출생이 자기 왕가(王家)에 대한 도전이요 위협이라고 느꼈다. 헤롯은 별이 나타난 때와 장소를 알고자 하며 장소가 파악되면 자신도 아기에게 경배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 2:7-8). 그러나 헤롯의 의도는 아기 왕에게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왕가에 대해 위협이 될 수 있는 이 아기를 살해하려는 것이었다. 비정치적인 인물인 예수의 생애는 출생시부터 정치권력자들의 위협이 항상 따라 다녔다.

II. 헤롯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은 꿈에 아기 메시아를 살해하려는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헤롯에게 아기의 출생장소를 알리지 않고 다른 길로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2). 나중에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분노한다. 헤롯은 메시아의 도래를 권력적으로 저지하기 위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들”을 모조리 죽이는 학살을 감행한다(마 2:16). 예수의 부모는 이집트에서 헤롯의 지시에 의한 아기 살해 사건을 피하였다가 그 다음 해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를 떠나 갈릴리 북동쪽에 위치한 유대의 작은 마을 나사렛로 돌아와서 여기서 정착한다,

예수는 30세에 복음 사역의 공생애를 당시 소외 지역이었던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시작한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에서 많은 무리들은 예수가 행하신 복음 사역에 호응하여 그를 추종한다.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마 4:23-25). 새로 즉위한 헤롯 안티파스는 이 보고를 받으면서 예수가 자기의 통치영역을 위협한다고 보고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예수에게 호감(好感)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이 정보를 알려준다: “여기서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눅 13:31).

예수는 헤롯을 “여우”라고 지칭하면서 대답하신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예수는 새로 즉위한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를 죽이고자 하나 자기의 길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정해진다고 확인하신다. 예수는 자기 죽음의 장소는 예루살렘이며, 헤롯의 통치영역인 예루살렘 밖에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오늘과 내일에는 아직도 갈릴리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복음사역을 하고, 그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제3일”에는 부활하여 승천하여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다.

III. 예수 운동의 상징정치적 의미: 타이센의 사회사적 탐구

독일의 신약학자 게르드 타이센(Gerd Theißen)은 그의 논문 “예수와 그의 시대의 상징정치적 갈등”(Jesus und die symbolpolitischen Konflikte seiner Zeit)에서 사회사적 탐구를 통하여 예수 운동이 가진 상징정치적 의미를 드러내었다. 예수 시대의 특징이란 로마 지배권력층과 유대 민중 사이의 관계가 상징정치적 갈등(symbolpolitische Konflikte)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긴장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의 함락이라는 폭력적인 갈등으로 바꾸어졌다.

이집트, 앗수르,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다음에 이제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우월한 로마군의 지속적인 점령은 유대의 종교・사회・도덕적 상황을 로마에 대한 다양한 강한 적응과정과 분리과정으로 몰아간다. 이 과정은 유대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범과 기대 안정성을 해체한다. 로마 점령군들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극단한 거절과 기회주의의 긴장, 저항과 신체와 생명을 보유하려는 관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주의 사고와 정치적인 무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유대왕 헤롯 안티파스와 총독 빌라도는 갈릴리와 유대를 로마제국으로 편입시키고 유대인들의 유대전통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고자 시도했다. 헤롯은 유대의 수도를 예전에 묘지(墓地)였던 지역, 티베리아로 옮김으로써 유대교의 정결계명과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켰다. 헤롯에 의한 황제 초상(肖像) 숭배 및 유대교 혼인법 무시 등은 유대교 규범을 중시하는 유대 민중의 분노를 야기시켰다. 빌라도는 주화(鑄貨)를 이방종교적 의식(儀式)상징(Kultsymbole)으로 새겼으며,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성전 보물창고로부터 보화(寶貨)를 끄집어 내었다. 빌라도는 유물을 묘지에 세우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민중들의 유대전통에 대한 충성심을 훼손시켰다.

이러한 빌라도의 정책은 유대 팔레스타인을 그리스-이방 문화에 조심스레이 통합하기 위함이었다. 총독 빌라도는 “사실적으로 불안을 야기시켰다. 빌라도의 상징적으로 수행된 유대 문화 말살 시도는 유대인들에게는 상징 정치적인 갈등으로 오도(誤導)되었다.“ 여기서 로마와 유대 사이에는 단순한 친구-적(敵) 모습 대신에 차별성 있는 강한 적응 과정과 친구-적 모습으로 분리 과정이 야기된다. 지배 권력의 시책(施策)에 대한 유대 상류층의 열광적인 적응과 이에 대한 하류층 열심당의 테러주의에 이르기까지 쓰디쓴 저항은 상징 정치적 갈등으로 해석되어진다. 위로부터 오는(von oben) 적응하고 타협하는 상징 정치에 이제 아래로부터(von unten) 오는 저항하는 예언적인 상징 정치가 대응한다.

이러한 상징정치적 과정은 예수 시대에 조용한 표면 아래 있었던 일을 보여준다. 상류층의 문화동화 정치에 대하여 백성 안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응하였다. 예수 시대에 유대 상류층은 세계의 권력 로마에 적응하고 제공되는 경력기회를 붙잡고, 유대의 전통을 보존하고 방어하려고 하였다. 타이센은 해석한다: “체제 전복에 대한 헤롯 안티파스의 불안은 정당하다. 세례자의 처형 후에 곧 새로운 선지자 나사렛 예수가 출현하였다” 예수는 현재 속에 작용하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였다. 예수는 한편으로는 전통을 수용하고 강하게 하며,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상대화하는 새로운 토라해석을 제공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무엇보다 상징행위를 귀신추방에서 제시한다. “귀신추방이란 상징적 저항으로 이해되어진다: 땅은 불결한 영들에 의하여 위협당한다. 이 영들은 인간들을 장악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한다. 낯선 문화적 군사적 힘들에 직면한 위험에 대한 불안들이 여기에 드러난다... 귀신추방의 전승자들이 악마들 중의 하나를 군대라고 말하며, 그를 직접적으로 로마의 군사들 그리고 (불결한 돼지)와 연결시킨다면 이것은 악마신앙, 귀신추방과 땅의 일반적인 상황이 연관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예수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을 세례자 요한보다 다르게 피력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군주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성전(聖殿)에 대한 간접적 비판과 결합하였으나, 예수는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면서(눅 13:22) 단지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무엇보다 성전 정화(淨化)의 상징행동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귀신추방, 성전정화, 성전예언 외에 예수는 상징정치적인 행동을 하였다. 예컨대, 열 둘 제자 부르심에서 명료히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12지파에 약속되었음을 말한다(마 19: 28-30). 예수는 “백성 가운데 소박한 사람들을 이 12지파의 군주와 재판관으로”지명한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도 총독의 취임에 대한 대립상(像)으로서 상징정치적 행동에 속한다. 타이센은 결론내린다. “예수는 단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비유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상징적 행동의 언어를 통달했다. 이 행동들 중의 여러 가지가 상징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수는 백성들과 땅 소유와 세금 질문에 있어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갈등을 주제화하였다. 예수는 세금과 성전 공과금으로 고통을 겪던 소농(小農)들을 직접적인 저항으로 선동하지 않고 새로운 메타정치적인 최고의 실제 공동체로 상징정치적으로 통합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은 것이라’는 산상설교가 선포되었을 때 세리들과 지주(地主)들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의 상징정치가 보여질 수 있다. 예수는 자기 시대의 상징정치적인 갈등에 개입하여 약하고, 고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고, 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통치의 선포를 통하여 귀족정치의 경력 선택권을 문제시하고 능가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귀족들과 백성 사이의 차이를 상대화하였다. “그는 상류층의 많은 가치들과 증언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되도록 공식화하였다. 작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는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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