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 세미나’, ‘전도 세미나’ 등에 관심을 갖는 목회자들이 많다. 목회현장이 힘들기 때문이다. 개척하고 3년을 버티면 성공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현재는 미자립교회 뿐만 아니라 자립교회, 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인 감소로 모두 힘든 상황이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분석이다. 코로나 사태로 예배가 제재를 받아서 교인 감소가 더 빨라진 것뿐이다. 교인이 감소하고 목회가 힘든 진짜 이유는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상황을 뛰어넘어서 역사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제자들이 숨었던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 오순절 성령님이 임하시자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을 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는 교회성장 프로그램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감소했다. 희망고문에 불과한 교회성장론 대신에 이제는 성령님에 의한 부흥을 간구해야 한다.
1.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교회를 침체시켰다.
‘앞문은 열고 뒷문은 닫아라’는 구호에 많은 목회자들이 열광했다. 교회성장 세미나에서 성공 사례를 듣고 희망을 가진 목사들이 성장프로그램을 도입한다. 필자도 신학생 때와 부교역자 때 담임목사님들이 도입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따라서 사역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기대감을 갖고 참여해서 활력이 넘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실망했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재시도한 교회들도 있었지만 성도들이 실망을 거듭하여 오히려 더 침체됐다. 필자도 개척 초기 때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사용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교회성장 프로그램은 대부분의 교회를 지치게 만들고 침체시켰다. 그 이유는 구호는 감동적이지만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큰교회와 달리, 작은교회는 문이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앞문으로 들어왔다가 앞문으로 나간다.
2. 최신 프로그램도 이미 과거의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발전하고, 소개된 방법론도 셀 수 없이 많지만 한국교회는 감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이 선교지라는 말도 나왔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최신 성장프로그램을 찾기도 하는데, 최신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방법론이 정리되어 나올 때는 그것은 이미 과거의 산물일 뿐이다. 교회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며 과거에 갇혀있지 않다. 또한 오늘이라는 현장에서 전혀 예상 못한 문제, 변화, 도전에 맞서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최신 프로그램이라도 이미 과거의 것이므로 현재의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성장모델이 되었던 교회들조차 감소했는데 이것은 교회성장론이 허구라는 증거다. 이제는 교회성장론 대신, 언제나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3. 교회성장 프로그램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성장한 교회에서 사용한 노하우를 배우려고 비싼 회비를 내고 충실하게 강의를 듣고 벤치마킹한 대부분의 교회가 실패하는 이유는 교회성장 프로그램은 모든 교회에 사용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각 교회마다 목회자의 가치관과 은사, 성도들의 열정, 교육수준, 연령층, 성향, 성도 숫자, 교회의 문화, 지역상황 등 너무나 다양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장한 모델교회와 똑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사람과 배경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 성장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배경이 다른 교회에 사용하는 것은 마치 물에서 고기 잡는 방법을 하늘에서 새를 잡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부 비슷한 교회에 일부 효과가 있을 뿐이다.
4. 교회성장론은 큰 교회 목사를 우상화 한다.
교회성장론은 큰 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큰 종이고 성공한 종이며, 작은 교회 목사는 작은 종이고 실패한 종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갖게 했다. 큰 교회 목사나 교회성장세미나 강사들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전도와 기도, 목회에 집중하라고 충고한다. 물론 전도, 기도, 목회에 게으른 목회자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작다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반대로 교회가 크다고 모두 전도, 기도, 목회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크기에 따라 목회자를 평가하는 것은 교회성장론이 만들어낸 불순한 프레임이다. 큰 교회 목사들 중에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교육시켜서 성도들 중에는 작은 교회 목사는 우습게 여기고 대형교회 목사는 우상화하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큰 교회 목사들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상석에 앉고, 부흥회 강사로 서는 등 귀빈대우를 받는 데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런 익숙함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충성하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패배감,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도구도 될 수 있다.
5. 교회성장론이 맘모니즘에 빠트렸다.
순수하게 작은 교회를 후원하는 큰 교회 목사도 있지만, 중요한 행사에서 순서를 맡겨주거나 언론에 이름을 높여줘야 후원하고, 자신을 높여주지 않으면 지갑을 닫는 목사도 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큰 교회 목사들을 높여준다. 교단이나 연합기관의 총회장이 되려면 수천만 원의 입후보비를 내야 한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데 쓴다는 거룩한 명분이다. 하지만 진짜 섬기려면 조건 없이 후원하면 되는데, 입후보비를 고집하는 이유는 대접받는데 익숙한 일부 큰 교회 목사들이 작은 교회 목사를 혹시라도 섬겨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공했다는 목사들이 이끌어온 한국교회는 왜 개독교라는 지탄을 받고 있으며, 감소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큰 교회 목사들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이유는, 교회성장론이 한국교회를 맘모니즘에 빠지게 한 결과이다.
6. 교회성장이 반드시 하나님이 인정한 것은 아니다.
어떤 교단에서 총회장 입후보비를 0천만 원으로 하는 안건으로 논쟁한 적이 있다. 한 목회자가 “0천만 원은 너무 많다. 큰 교회 목사가 총회장이 되려는 꼼수가 아니냐?”고 비판하자, 자칭 수만 명을 목회한다는 증경총회장이었던 큰 교회 목사가 “0천만 원을 낼 수도 없는, 실패한 목사가 총회장이 되면 어떻게 교단을 이끌 수 있느냐?”며 모욕하고 우격다짐으로 통과시켰다. 그런데 그 수만 명 목회를 했다던 증경총회장 목사는 교인감소로 부득불 교회를 매각하고 뒷방노인네 신세가 됐다고 하니 참 안쓰럽다. 큰 교회들이 경매당하거나 이단에게 팔리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현재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고, 하나님이 인정한 부흥이라고 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알고 겸손해야 한다.
7. 교회성장과 교회부흥은 다르다.
교회성장을 교회부흥과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별개이다. 교회성장’은 ‘성도 수의 증가’를 뜻하고 ‘부흥’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회복’이다. 오순절에 3천 명이 회개하는 부흥이 일어났다. 베드로의 설교능력이나 성장프로그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였다. 인간의 능력이나 성장프로그램에 의한 것이었다면 베드로가 가는 곳마다 똑같은 역사가 일어났겠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즉 부흥은 반드시 많은 숫자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회개와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반면에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도 있고, 인간의 방법에 의한 것도 있다. 인간의 방법으로 숫자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은 이단이 증명해준다. 이단들은 큰 교회 목사는 큰 종이고 진짜 종이라고 교육받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대형 경기장을 빌려서 행사를 하며, ‘한국교회는 감소했지만 자신들은 진짜라서 수십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고 언론에 교주를 자랑한다. 따라서 성령님에 의한 부흥과 인간에 의한 성장, 사탄에 의한 성장 등으로 구분해야 한다.
8. 교회부흥은 성령님의 선물이다.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이미 성장한 교회들의 결과를 보고 성장요인을 짜맞춘 결과론적 답안이며, 그것으로 성장 비법을 만든 인위적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장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공한 목사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미국 켄터키주의 에즈베리대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나서 텅 빈 예배당이 꽉 채워지고 예배당에 들어가기 위해 6-7시간 기다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전 세계에 영감을 주었다. 에즈베리 부흥은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어떤 프로그램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큰 교회 목사가 설교하지도 않았다. 순수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교만을 버리고 성령님이 진정한 부흥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9. 성령님은 달란트만큼 충성하게 한다.
필자도 한 때는 ‘전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에 감명을 받고 세계 지도를 걸어놓았다. 그런데 모든 목회자가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뜻일까? 인간의 욕심 아닌가? 스데반이 1명도 전도 못하고 순교한 것은 좋은 전도방법을 사용하지 않아서인가? 예수님은 각자의 재능에 맞게 달란트를 나눠주시고, 달란트만큼 충성한 자들에게 똑같이 칭찬하셨다. 목회자가 게을러서 받은 달란트만큼도 못하면 실패한 것이지만, 받은 달란트만큼 충성하면 단 1명을 목회해도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신다. 큰 교회 작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달란트만큼 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다. 필자는 교회성장론자들의 허황된 이론보다는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27:23)는 말씀을 붙잡는다. 내게 맡겨주신 양 떼, 소 떼에게 최고의 꼴을 공급하기 위해, 작은 교회 큰 교회 상관없이 순수한 목회자들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싶다. 달란트에 충성하게 부흥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주님! 맡겨주신 달란트만큼 충성할 수 있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김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