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철학자인 J.P.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같은 자연과학만이 실재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라고 정의했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 이룩한 발견들과 그것들을 응용한 기술을 사용하여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생산, 이동, 건강, 정보교환 등을 이룩하였다. 이런 과학의 실적 때문에 우리는 과학주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화론을 앞세운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믿음을 이성과 합리성의 테두리 밖으로 몰아내면서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조롱하게 만든다. 이런 사회적인 압력 때문에 “그리스도인 중에도 진화론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창조론에 대해서는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라고 데이비드 노에벨은 개탄한다.
모어랜드는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에서 과학주의의 목표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범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가 과학주의로 충만해 있을 경우 타당성의 패러다임을 과학주의가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인식과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특히 진화론의 패러다임은 성경의 가장 앞부분인 창세기의 내용을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를 일으킨다. 창세기의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해 본 경험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과학주의는 여러 측면에서 기독교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첫째, 신앙적인 측면이다. 성경의 지식에 근거했던 신앙을, 그 지적 근거를 상실한 맹목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독교의 주장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둘째, 개인적 삶의 지침의 측면이다. 과학주의 이념은 삶의 방향을 진리의 추구에서 즉각적인 욕구의 만족으로 변화시킨다. 과학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분이 주신 인생의 목적, 선악의 기준, 하나님 나라의 약속, 그분과의 관계 등과 관련하여 어떤 절대적 기준도 부정한다. 추구해야 할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인간은 현재의 욕구 만족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게 된다. 셋째, 윤리적 측면이다. 과학주의는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던 삶을, 그저 해를 끼치지 않는 미니멀리즘으로 변화시킨다.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할 경우 반드시 지켜야하는 도덕률이 사라지게 되며 단지 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처럼 적극적이고 한계가 없는 선의 추구는 생각할 수도 없다. 넷째, 자유 추구 방식의 측면이다. 자유에 따른 책임을 중시하던 전통적 관점에서 책임의 미니멀리즘 혹은 책임은 없어진 단순한 권리로의 변화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할 때 그에 따른 책임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관점이, 책임은 없는 권리로 바뀐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적 의미의 성적인 자유란, 순결하고 거룩한 삶 속에서 하나님이 허용하신 제도 안에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며, 그 결과로 잉태된 생명을 사랑으로 양육하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적 자유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제도와 무관하게 언제든지 원하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며, 가정이라는 제도나 생명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 관용의 의미의 변화이다. 전통적인 관용은 자신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하는 사람 즉, 그 인격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며 그 반대되는 행위나 생각에 대해서는 다양한 노력을 통해 반대하고 설득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관용은 자신과 다른 관점을 반대하거나 설득할 수 없고, 그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무제한 관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절대적 기준을 거부하기 때문에 상대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도 도덕적 항의를 할 수 없다.
과학주의는 세상 속에서 성경의 가치를 지키려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한다. 우리가 과학주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까닭에, 세상 속에서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내세울 용기가 없는 것은 세상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권위와 용기를 준다. 따라서 과학주의에 동화되는 것을 피하려면 그에 대항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증거가 없거나 선택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지식에 기초한 확신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윌버포스는 “변증을 훈련시키는 일은 기독교 교육과 양육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에 실패하면 우리 자녀들이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기독교 신앙 변호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요한복음 14장과 20장에서 도마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문을 끈질기게 제기했다. 믿음이 부족한 제자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확신을 가지도록 답을 주셨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도마와 같은 신앙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학주의에 세뇌된 다음 세대들에게 먼저 그것을 극복할 확신을 줄 지식이 필요한 시대이다.
#류현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