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최근 제412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는 박형신 교수(한국기독교역사학회 기획이사, 남서울대)의 사회로, 강성효 목사(영주 장수교회 은퇴목사)와 김영웅 박사(장신대)가 각각 발제했다.
먼저, ‘개신교 초기 경북지역 선교 형태와 특징: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한 강성효 목사는 “1894년 이후 1923년 사이의 경북지역 선교 환경은 어떠했을까”라며 “교회 외적으로는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국제적 무력 충돌과 일제의 교회 탄압과 교회 자도자의 투옥과 고문과 순교는 1945년 해방되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이어 “교회 내적으로 경상도 부북지역(경북) 선교와 관련해선 부산 선교부에 속해 있던 베어드 선교사의 뒤를 이어 내구한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며 “아담스는 1897년 11월 1일 김재수 및 자신의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와 선교 사역을 시작함으로 경북지역 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영적으로는 1903년 원산에서부터 시작된 회개운동이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를 계기로 전국적 회개와 각성 운동으로 확산되며, 교회는 말 그대로 요원의 불길처럼 대부흥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와 함께 노회가 설립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911년 9월 17일 제 5회 노회에서 총회 창립을 목적으로 대리회 조직을 개편하여 지역별로 노회를 설립하도록 결정함에 1911년 12월 6일 경상노회가 부산진
예배당에서 조직 노회로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 1912년 9월 1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설립되었다. 더 고무적인 사건은 경상노회가 설립 5년만인 1916년 6월 22일 제 12회 노회에서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정하고 동년 9월 총회의 허락을 받아 12월 27일 제 1회 경북노회를 대구 남성정교회에서 연 것“이라며 ”이는 대구 선교부 설치와 함께 복음 전파의 또 한 축인 교회의 연합 활동과 행정적 지원 체계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김병희가 편역한 박덕일의 「경북교회사」와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서 발췌하여 「경북교회사」에 함께 수록한 내용을 근거로, 먼저는 경북지역의 복음화 과정은 4단계로 나누어 진행됐다”며 “제 1단계는 대구부에서 시작되었으며, 제 2단계는 대구 근교로 확대되었다. 제 3단계는 대구 선교부가 효율적 선교를 위하여 지역을 분할 및 전담 선교사를 배치했고, 제 4단계는 복음 전파 주역들이 선교사나 조사들에서 경북 북부지역 주민들 중 서양 문물과 복음에 일찍 눈을 뜬 선각자들로 바뀌고 그들이 대구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접경지역으로 내려가 복음을 수용하고 자기가 사는 지역에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함으로 경북 전역이 복음화되었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복음 전파 경로는 대구에서 주변으로, 다음은 대구에서 김천, 상주에 이르는 서쪽 경로, 대구에서 경주, 연일, 영덕, 청송에 이르는 동쪽 경로, 대구에서 칠곡, 군위, 의성에 이르는 북쪽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고, 완성은 북부지역 선각자들이 대구와 접경지역으로 내려와 복음을 받아가서 자신들의 지역에 전파함으로 경북 전역이 복음화”고 했다.
또 “셋째로 지역 간 차이점은 선교사의 근무 여부, 기간, 자세가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확인하였다”며 “넷째로 설립된 교회에 직원의 유무도 복음 전파와 확산 및 교회 형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으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강 목사는 “다섯째로 경북 북부지역 복음화가 늦어진 또 하나의 원인은 천연적인 환경의 조건 때문”이라며 “이 지역은 산지요 오지로 도로가 열악하여 접근하기 어렵고 거주 여건도 좋지 않아 인구도 적으며 경제적으로도 낙후되어 있었다. 부해리 선교사의 성과 뒤에는 경부선을 통한 접근성의 용이함, 많은 인구, 경제적 여건 등이 선교에 큰 몫을 하였다고 본다”고 했다.
아울러 “여섯째로 278(275)개 교회들이 설립될 때의 양상을 근거로 당시 교회 설립 요건을 교인의 수, 직원, 예배당(예배처소) 등 세 가지 면으로 살펴 허락 여부를 결정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장신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미 남장로교 선교사 신학: 조직신학 교수 크레인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한 김영웅 박사는 “장신신학 안에서 선교사의 신학은 ‘개혁파정통주의 신학’ 또는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신학’, ‘칼뱅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이라 분류된다. 이 신학의 특징은 구 프린스턴 학파의 신학을 계승하였다고 평가되며, 보수적인 신학전통에 서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선교사 신학에 대한 평가는 장로회신학교의 신학 형성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었다”며 “선교사 신학의 일방적인 신학 교육 결과로 한국 장로교회와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이 편파적이고 편협하고 포용성이나 융통성이 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킨 신학적인 오해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크레인의 신학은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을 대표’하고 있다고 평가되며, 보수적인 개혁신학을 기본으로 하지만 개방적인 포용성을 가졌다”며 “따라서 장로회신학교로부터 시작하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 형성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기존의 연구들에서 소외되었던 크레인의 신학에 대하여 제대로 된 이해와 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선교사들은 장신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매우 강조하였다”며 “그들의 신학적 기준은 성경과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신조들이다. 선교사들이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개혁교회의 전통이자 장신신학의 중요한 토대이다. 특히 ‘1985년 장로회신학대학 신학성명’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고 했다.
이어 “선교사들은 신학교육을 통해 장로교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다. 물론 그들의 신학이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며 변화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당시의 환경과 상황에서는 상당한 기여를 했다”며 “특히 크레인의 신학은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전문적인 신학교육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고 했다.
아울러 “선교사들의 신학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종말론 전통에 건강한 종말론을 소개하였다.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공식적인 종말론인 ‘무천년설’을 크레인은 교단의 공식적인 종말론 채택 이전에 자신의 신학교과서를 통해 가르쳤다”며 “그의 종말론은 선교사 신학이 ‘역사적 전천년설’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장신신학의 종말론 토대가 되는 ‘무천년설’도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쳤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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