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징계”라는 주제는 사실 매우 무겁고 또 무서운 주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이런 것들이다. “채찍질”, “풀무불”, “연단”, “광야”, “포로”. 하나같이 우리에게 “고통의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단어들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하나님의 저주”와 같은 것으로 오해 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목적지가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소멸과 진멸이 그 목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과 회복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회초리로 쳐서 죽이는 것이 목적이고, “하나님의 징계”는 회초리로 쳐서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좋은 말로는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인간을 회초리로 쳐서 변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지 않고 살리기 위한 것이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여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히 12:6)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 있어서 변화를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죽지 않고 살 수가 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다.
하나님의 징계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 징계의 목적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목적에 합당하게 반응할 때만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는 곧 하나님의 저주가 되어 버리고 만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1-13)
우리의 다리를 절게 만드는 것, 우리의 손과 무릎을 피곤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망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무지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아주 따끔한 깨우침을 얻게 하심으로써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 4:13-16)
그러므로 징계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고통 그 자체는 징계의 목적이 아니라, 징계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고통이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너 위에 나 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 바로 징계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과 같은 징계의 시대를 살아갈 때 그 징계가 주는 고통에 매몰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가르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일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게 재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기 위한 것이며, 이 징계가 그들에게 진정한 미래와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사화복, 삶과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반드시 이해하고 인정해야만 함을 가르쳐 주시기 원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셔서 지금 토기장이가 하고 있는 일을 보게 하고 계신 것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2) 무슨 의미인가?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9-10)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이 낮고 낮은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서도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며” (시 138:6)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신 주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섭리의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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