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우남의 출생과 교육환경
1. 우남의 출생과 가정환경
가~나.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옹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우남 이승만은(李承晩, 1875년-1965)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에서 청빈한 가정인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7-1912)옹과 서당 훈장 김창은(金昌銀,1833-1896)의 외동딸인 어머니 김해김씨 (金海金氏, 1833- 1896) 사이의 3남 2녀 중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우남의 두 형은 모두 우남이 태어나기도 전에 홍역을 앓다가 죽었기 때문에 우남은 사실상 가정의 외아들이며 아버지에 이어 6대 독자가 되었다. 우남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 손, 즉 이성계의 18대손이었다. 이처럼 우남의 가문은 조선사회에서 으뜸가는 왕족이었지만 그의 가계는 한파로 알려진 양녕대군 파에 속한데다가 그 파내에서도 격이 낮은 이흔의 서계(庶系)를 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몰락한 양반이나 다름없이 빈한하였다.
이러한 그의 특수한 가족 배경은 그로 하여금 조선왕조에 대해 비교적 냉담한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다른 양반들에 앞서 사민평등과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우남의 어머니, 김씨는 모든 점에서 뛰어난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부친 이경선 옹보다 6살이 위였으며,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답게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에 헌신적인 분이었다. 먼저 태어난 두 아들이 죽고 나서, 오랜 기간 아들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나이 40이 다 되어서 얻은 우남에게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북한산 문수사에 가서 치성을 드려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녀는 동시대의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진보된 머리에 보다 높은 교양을 지니고 있었던 어머니는 우남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난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시골 서당훈장의 따님이었던 우남의 모친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손수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며 시작(詩作)을 훈도 할 정도로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학식이 높았다.
이승만의 전기를 쓴 올리버는(Robert T. Oliver) “그녀는 당시로서는 많이 개화되어 있었으며 아는 것이 많은 여인 이었다”고 하였다. 우남도 자신의 모친이 서당훈장의 딸이었고 어렸을 때 천자문과 시상(詩想)을 어머니에게 배웠다고 했는데 그의 모친은 글을 직접 가르칠 정도로 아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상당한 학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우남은 여섯 살 때에 천자문을 모두 암기하게 되었다. 부모는 이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남편을 설득, 거처를 황해도에서 서울로 옮겼다. 서울에서 그녀는 삯바느질로 집안 살림을 꾸려가면서 아들의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후에 우남이 출중한 학자, 정치가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보다도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정성에 힘입은 바 컸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적인 측면 외에도 우남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로부터 불교의 기초 원리를 배웠으며, 어머니는 매년 자신의 생일이 되면 우남을 절에 보내서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소년시절의 성장환경은 우남의 기질에 적지 않는 영향을 주어 비록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한평생 그를 사고하는 방향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승룡에게 공자(孔子)의 도를 설득시키는 한편 매년 그의 생일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곤 하였다. 후년에도 이승만은 소년시절에 북한산 중턱에 있는 절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의 인상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하곤 하였다. 속세를 멀리 떠난 듯한 고매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소년의 눈에는 딴 세상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절의 벽에 어마어마하게 그려진 극락과 지옥 속의 가지각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오백나한을 보고 연꽃 향기 그윽한 극락에 와있는 것과 같이 느꼈다고 한다... (중략) 1946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후, 우남 내외는 그 절을 방문하였다. 그는 절의 문 가까이에서 발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조그만 소리로 “참 아름답다 참 아름답단 말이야.” 하고 감탄사를 되풀이 하였다. 후에 그는 담소를 할 때마다 불교의 평안과 한가한 자기망각이 기독교의 박애(博愛)의 정신과 조화를 이룬다면 불안에 떠는 수백만의 인간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이원순, 『인간 이승만』)
이처럼 우남은 전형적인 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머니로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후에 우남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신앙인 불교신앙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여 진다.
신긍우가 처음 배재학당에 들어오라고 권했을 때 우남은 다음과 같이 거만하게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그들이 천지의 질서를 바꾼다손 치더라도 내버려두게 나는 어머니가 주신 종교를 버릴 수는 없다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남에게 지도적인 감화를 주신 분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모친으로부터 불교의 기초 원리를 배웠다. 어머니는 매년 내 생일에 나를 절에 보내서 불공을 드리게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산에 자리 잡은 그 아름다운 절의 첫인상이 얼마나 좋던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분위기며 금욕적인 환경이며 모든 것이 어찌나 속세와 다르던지 나는 꿈나라에 간 기분이었다."(최종고,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사상록 - 우남 이승만』)
우남의 어머니 김씨는 허약하게 보이는 여자였지만 남자 이상의 강직함을 가지고 조용한 중에도 차분하고 강인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남이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반대에 부딪히면 자신의 소신과 주장을 상대에게 충분히 납득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머니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우남은 더 할 나위 없는 자랑이었고 희망이었다. 아들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으며 우남의 재능을 알아 본 사람이었다.
우남은 아버지에게로 부터는 훈계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알뜰하고 한결같은 배려로 그를 감싸주신 분이었고, 헌신적인 애정으로 그의 사상과 감정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신 분이었던 것이다. 1939년에 쓴 비망록에 우남은 다음과 같이 어머니에 관하여 적고 있다.
"어머님은 내가 무거운 것을 들거나 돌을 멀리 던지는 놀이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붓글씨를 쓰는데 중요한 손의 신경 조직을 상할까 두려워하셨기 때문이다. 어느 친구가 거문고 연주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적도 있지만 나는 글씨를 연마하는데 방해가 될까 해서 이것도 사양하였다. 훗날 나는 그때 음악을 배우지 못한 것을 무척 후회하곤 했는데 그때 배워두었더라면 나이가 든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서예 공부에 대해서는 우남이 1936년 12월 16일에 적은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다.)
우남은 모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는데 이것은 당시 아동들의 한문 입문서였다. 나이 여섯 살에 천자문을 떼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웃사람들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우남은 그날의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부모가 그날 마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모친은 우남에게 한시(漢詩)도 가르쳤는데 우남이 가장 좋아하던 한시는 “바람은 손이 없으나 모든 나무를 흔든다, 달에겐 발이 없으되 하늘을 거닐며 여행을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우남이 평생 시를 쓰는 일에 취미를 갖고 시작(詩作)을 하게 된 것도 그의 어머니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남의 모친은 당시에 가장 유식한 부인이었던 모양이다.
우남의 어머니는 1896년 양력 9월 2일에 돌아가셨다. 당시 우남은 22살의 청년으로 배재를 졸업한 후에 춘생문(春生門)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를 피해서 황해도 평산에 숨어 있어서 어머님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의 영구(靈柩)를 모시지 못하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기고 있다.
"이십 이년을 길러주신 어머님의 은혜로
오늘의 신체발부는 정말 건장하구나
어머님의 영구를 유택(幽宅)에 평안히 모시지 못하다니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이승만 지음, 이수웅 옮김 『이승만 한시선』, 대전: 배재대학출판부, 2008)
우남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연세 90이 되어 하와이 병원이 있을 때에 오랜 병상생활에서 우남은 힘이 들면 ‘아이고, 아이고’ 하며 괴로워 할 때도 있었고, 또 열이 심할 때는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며 신음을 했다고 하였다. 90이 된 우남에게도 어머니의 품은 다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과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계속>
※ 기독일보는 2023년 새해를 맞이해 김낙환 목사(D.Min)가 저술한 논문 '우남 이승만 신앙연구: 신앙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중심으로'를 연재합니다. 지면 분량 상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