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운동과 한국교회, 1965-1974(5)

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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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빌리 그래함의 집회는 빌리 그래함 대회 본부 측과 한국 측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한다.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 집회를 연 것이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 집회는 한국교회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교회와 함께 이 집회를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며 조율해 나갔다. 재정은 한국 측이 약 8천만 원 빌리 그래함 재단이 1억을 지출하였다. 특히 외국 강사와 홍보에 대한 비용은 전적으로 빌리 그래함 재단이 담당하였다. 비록 이 대회의 강사는 전적으로 빌리 그래함 재단의 강사가 도맡았지만 사회와 기타 순서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한국교회의 집회에 왜 외국인을 초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계속 제기 되었다. 이것은 이후의 한국교회의 대형집회에서 보다 한국인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우선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고, 범 교단적인 조직을 만들며, 전도훈련을 시키고, 개 교회에 그 사람들을 연결시켜 준다. 이것은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났다. 먼저 이 집회는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73년 5월 16일부터 전국의 9개 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열었는데 연인원 120만 명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5월 30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집회가 열렸다. 마지막 날엔 110만 명이 참석하였고, 4일 동안 연인원 320만명이 참석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교회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건이다.

빌리 그래함 집회는 대중전도집회를 운영하는 기술을 한국교회에 잘 보여 주었다. 먼저 전국 순회 집회를 통하여 분위기를 고조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서울 여의도에서 집회를 가짐으로서 대회를 클라이막스로 이끌어 갔다. 빌리 그래함 측은 공항에서 200명이 넘는 찬양대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대통령면담, 기자회견, 주요일간신문의 기사, 연세대학교 명예박사학위 취득 등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끌 수 있는 많은 이벤트를 만들었다. 또한 집회가 시작할 때 헬기로 청중들에게 나타나고, 집회가 마치기 전 헬기로 청중들에게서 떠났다. 이것을 가지고 비평가들은 빌리 그래함 집회가 지나치게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대중집회의 전통이다. 조지 휫필드에서부터 무디에 이르기 까지 부흥운동은 당대의 광고전략을 받아들였다. 휫필드는 항상 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집회를 광고했으며, 무디 역시 가능한대로 열심히 자신의 집회를 홍보하였다. 어떤 사람이 무디에게 왜 하나님의 종이 그렇게 열심히 광고하느냐고 질문하자, 무디는 광고하지 않고 빈 좌석을 향하여 설교하는 것 보다는 광고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종교사회학자인 피터 버거는 전통적인 교회의 목회자는 관료와 같고, 새로 등장하는 신흥교단의 목회자는 상인과 같다고 했다. 광고는 더 이상 강제로 신앙을 강요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에 대한 평가 가운데 하나는 대중의 재발견이다. 연세대 유동식교수는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통해서 민중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민중의 종교적인 욕구가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를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강사나 조직보다는 이와 같은 민중의 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직 민중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유동식교수가 말하는 민중은 대중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민중신학의 민중은 지배자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민중이지만 유동식교수는 그런 계급적인 의미로 이것을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동식교수는 정작 민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를 통해서 충족되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유동식교수는 이 집회가 얼마나 예언자적인 발언을 했느냐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이 집회를 통하여 얼마나 민중들의 욕구가 분출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빌리 그래함 집회를 국제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박정희정부는 유신 이후 국제적인 지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빌리 그래함은 미국에서 역대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며,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닉슨과 절친했다. 실제로 빌리 그래함은 호룰룰루에서 닉슨과 통화를 했더니 박정희대통령에게 닉슨의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려고 하였고,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닉슨과 절친한 빌리 그래함은 박정희에게 충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울러서 유신독재로 미국에서 비판을 받고 있던 박정희는 빌리 그래함의 집회를 후원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비판여론을 완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빌리 그래함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영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70년대 초 한국의 정치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월남전에 시달린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를 원했고, 또한 미국은 월남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북한은 계속 남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반정부 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했지만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안보를 걱정하였다. 특별히 북한에 뿌리를 둔 한국 기독교지도자들은 더 했다. 이들은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기간 중인 5월 30일에 열린 철야집회에서 북한의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기도했다. 이것은 북한을 자극했고, 바로 다음 날인 6월 1일에 이 집회를 “귀신에 매달리려는 귀신의 푸닥거리 놀음”이라고 규정하고, “남조선 당국자들이 미국 전도사 놈과 작당하여 푸닥거리 놀음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북한이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는 한국교회사상 뿐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사상에도 유래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집회는 한국교인들에게 한국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었고, 이제는 한국사회의 변두리가 아니라 주류가 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 이 집회를 마치고 이 대회의 총무로 활약했던 오재경목사는 이 집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이 집회는 한국교회의 일치를 보여 주었다. 비록 소수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 대회는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참여한 집회였다. 둘째, 이 집회는 한국민의 저력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대형집회가 아무런 사고 없이 질서정연하게 치루어졌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고, 이것은 매스컴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셋째, 이 집회는 한국기독교가 공산주의에 맞설만한 반공의 보루라는 것이다. 70년대 초, 한국은 북한과 체재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기독교는 바로 대한민국의 체재를 수호하는 대한민국의 주체세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넷째, 이 집회를 통하여 한국은 민주우방과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한국기독교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당시 한미관계는 상당한 위기에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하여 한미관계가 더욱 공고하게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기독교세계의 일원으로서 세계선교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섯째, 한국 기독교가 정부의 협력으로 이 집회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반공세력의 공고화를 원했고, 기독교 역시 본질적으로 반공을 강조했다. 따라서 반공을 매개로 한국교회와 정부는 서로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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