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가 지구상에 이어가는 동안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어린이는 예외 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한정된 지구라는 면적 위에 무한정으로 늘어가는 인구 문제로 많이 들을 수 있는"산아제한"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한때 한국에서는 정부 산하 보사부를 통해서"아들이든 딸이든 둘만 낳자."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산아제한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불란서 같은 나라에서는 다산하는 사람들에게 포상을 주고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아제한을 권장하던 한국은 무조건 어린이의 출산을 권장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린이가 없는 집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유족해도 허탈한 것입니다. 1년에 한차례씩이라도 어린이에 대하여 눈길을 돌려본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어린이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서 그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어린이는 아름답게 보면 한없이 아름답고, 귀찮게 보면 대단히 귀찮은 존재로 보이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린이는 어린이인데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어떻게 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어린이 보는 눈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어린이를 보는 견해, 각도, 관심을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전과 다르게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사람들이 어린이를 대하는 모습보다예수님은 그 아이에게서 귀한 값을 찾아 놓으셨습니다. 다른 신이나 다른 종교에서는 어린이를 제물로 쓰기도 했습니다.
역대기 하 33:1-6에 보면 므낫세 왕 때에 이방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길 때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뽑아 놓은 아이들을 피워 놓은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태워 죽이거나 안 들어가려는 어린이를 덥석 안아다가 불 가운데로 집어넣어 주문을 외우고 제사했습니다.
이것은 약 2,700년 전 시대에 이교도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지한 세계 각처에서는 잘 생기고 똑똑한 어린이를 뽑아서 잡신이나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로 사용했고 바닷가에 사는 무지몽매한 어부들이 해상 사고가 없게 해달라고 굿을 하고 비는 축제에 어린이를 끌고 가서 가라앉으라고 돌을 붙들어 매어서 바다 속 깊이 던지며 용왕의 보호를 비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덕을 가장 많이 말하는 유교도 생각하면 어린이만은 푸대접을 했습니다. 그것은 논어나 기타 유교 서적이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부터 어린이를 보는 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마가복음 10:13-16에 보면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해 달라고 데리고 온 아이들의 부모에게 방해한다고 소리치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매우 민망해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눈 속에는 어린이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나 기독교의 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지금도 아직 어린이를 전혀 무시하고, 어린이를 살리고 죽이는 권리가 부모에게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어린이를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의 영혼이나 어른의 영혼을 모두 한가지로 소중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서 누구나 어린이를 영접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있는 영혼을 존중하여"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함이니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치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린이를 사랑하며 영접하며 축복하여 완전히 어린이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2) 예수님은 어린이에게서 좋은 점을 찾으셨습니다.
사람은 다 불완전해서 어떤 사람에게나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이 있습니다. 단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장점은 있습니다.
가령 미스터 김이란 교인이 기도를 잘못하는 단점이 있는가 하면, 전도를 잘하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듯이 사람마다 장, 단점이 있습니다.
어린이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어린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어린이라고 해서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이에게도 좋은 점이 있는가 하면 나쁜 점도 많습니다.
① 이유 없이 심술부리는 것 ② 자기 배만 부르면 만족해하는 것
③ 어리석은 짓 하는 것 ④ 분수없이 돈을 달라는 것
⑤ 터무니없이 조르는 것 ⑥ 잘 못나가서 하지 말라고 해도 억지를 쓰는 버릇
어린이에게 단점이 많은데 예수님께서 단점을 모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남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많이 보고 좋은 점을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이 떠나 있으면 장점은 가려지고 단점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의 눈을 보십시오. 그의 눈에는 흠, 결함, 약점,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이를 보실 때 단점보다는 장점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점을 어린이에게서 찾아 보셨던 것입니다. 간사함이 없는 어린이, 그 천진난만한 것을 보실 때 한없이 기쁘고 만족스러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시고"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18: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에게서 장점을 보신 것은 어린이가 순진하고 꾸밈이나 가증한 것과 위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뢰심이 많습니다. 부모를 신뢰하는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젖을 사모하는 어린아이를 우리가 연상합니다.
어린이는 겸손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처럼 악의도 품지 않고 음란한 마음도 갖지 않고 아무에게도 소송을 걸지 않고 중상하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단점이 많은 어린이에게서 장점만을 찾으십니다. 어린이에게서 장점을 찾으신 것은 어린이를 그만큼 사랑하신 때문입니다. 이렇게 넘치는 사랑으로 보시는 중심이 예수님의 어린이를 보는 눈입니다.
(3) 예수님은 다음 세대를 내다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보실 때 당장에 나타나는 그 얼굴, 그 모습만 보신 것이 아니라 20년 후, 30년 후를 내다보십니다.
이른 봄에 꽃나무에 손질을 할 때 그 잎도 돋지 않은 그 식물을 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 후에 아름답게 꽃을 피워 그 주위를 그윽하게 해 줄 것을 연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 세대를 내다보시면서 그들의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제 2세대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은 장래를 어린이에게서 기대했습니다. 시간의 문제이지 시간만 흘러가 보십시오. 오늘의 어린이가 이 나라의 대통령, 상하의원, 국회의원, 과학자, 의학자, 법학자, 경제학자, 훌륭한 교육자도 되고 루터나 칼빈 같은 위대한 종교 지도자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장래를 내다보실 때에는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귀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사람이란 다 어린이의 시절이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어린이는 다음 세대에 교회의 기둥입니다. 교회는 얼마 후에는 오늘의 어린이의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20년, 30년 뒤를 내다볼 때에 오늘의 주일학교에 대해서 우리 장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들도 예수님이 보시는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장차 교회의 기둥이 될 어린이를 일반 교육에만 열중시킬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육을 어려서부터 착실한 신앙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데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