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스도인이 사회학자로서 극단적 페미니즘을 찬성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는 성경의 진리와 자신의 사회학적 주장 사이의 충돌을 매일매일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르게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돕는 배필이 되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은 부부의 관계를 이루라는 성경과는 전혀 상반되는 학문적 주장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정직하려면, 그는 신앙과 학문 중의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전통의 유교적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 세계관 속에 성장하였다. 그리스도인 아내와 결혼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지만, 진선미의 기준은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유교 각각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둘의 차이를 분별하는 능력은 더욱 없었던 것 같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암송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기독교 진선미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름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를 몰랐기 때문에 익숙했던 이전 삶의 양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되면서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는 혼합된 세계관의 정체와 그 뿌리를 짚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혼합된 세계관 때문에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교회에서는 교회의 법을 따르는 이중적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혼합된 세계관에 대한 자각과 반성만으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오래 의존해왔던 이전의 세계관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내 삶의 기준을 성경적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에서 ‘견고한 진’으로 작용했다.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기에, 사도 바울마저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은 철학이나 윤리학 등의 인문학적 지식을 섭취하여 유식해 지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이것은 영적전쟁의 상대를 분별하기 위한 과정이며, 상대의 공격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나의 가정과 내가 받아 온 교육 등 어떤 시기, 어떤 경로로, 어떤 세계관이 영향을 미쳤는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 준다.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범신론자, 다신론자, 무신론자들은 절대적인 기준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의 문제점은 서로의 이익이 부딪치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 분쟁을 해결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 분쟁의 해결은 힘을 가진 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상황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독일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각각 검사와 판사를 임명했고, 독일의 전범들은 변호인을 내세워 자기를 방어하였다. 검사들은 이들을 반평화적 범죄 공모, 침략전쟁의 계획과 실행, 전쟁법 위반, 반인륜적 범죄 등의 죄목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변호인들은 “각국의 법률이 다르고, 법률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던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가능한가?(죄형법정주의)”라는 근본적이면서 상대주의적인 질문으로 검사들을 괴롭혔다.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국가 기반의 법률체계로 이들을 처벌하기 힘들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상대주의 법정에서는 힘을 가진 전승국들이 침략전쟁을 가장 악질적인 범죄로 규정하고 이것을 소급적용함으로써 전범들을 처벌하였다. 이것이 상대주의자들의 문제해결 방식이다.
이처럼 세계관은 우리 삶의 기준을 어디에 맞추느냐의 문제이다. 가장 중심되는 것이 진(참과 거짓), 선(선함과 악함), 미(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기준이며,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말씀에서 찾는다.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은 흐트러지고 뒤섞인 기준들을 성경의 기준으로 일치시켜가는 과정이다. 명제적인 기준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절대적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난 인격적 기준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합당하며, 사랑과 공의가 균형을 이룬 선한 진리가 이 땅위에서 아름답게 행해지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절대적 기준들을 명제적으로 일일이 제시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묵상하고 깨달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기준임을 믿고, 말씀에 비추어 삶의 모든 결정을 내리겠다는 결단과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바로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이번 선택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는 영적 민감함이 있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성령께서 다시 깨닫게 하시고 고칠 기회를 주신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영적전쟁이며, 그리스도인의 성화 과정일 것이다.
#류현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