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장신대 총장 김명용 박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온신학TV에서 ‘칼 바르트는 어떤 신학자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김 박사는 “칼 바르트는 1886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해서 1968년 세상을 떠난 스위스의 신학자이며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신학 정신을 이어 받은 개혁파 신학자”라며 “1934년 칼 바르트는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성명으로 알려진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로 한다”고 했다.
이어 “바르멘 신학선언은 히틀러 시절, 독일교회에 빛을 드러낸 신학선언이다. 칼 바르트는 이것을 기초로 독일교회의 신학적 스승이 되었고, 1948년 WCC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했다”며 “그는 젊은 시절엔 자유주의 신학을 탐닉했고, 종교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펜빌이라는 곳에서 작은교회 담임목사로 사회주의 운동에도 앞장섰다”고 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초순에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그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블룸하르트(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1842-1919 독일 루터교 신학자, 종교사회주의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로마서를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블룸하르트의 가르침이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알게 된다”며 “그래서 마침내 써낸 유명한 책이 1919년에 출간된 ‘로마서 강해 제1판’이다. 이 책으로 칼 바르트는 시골 조그만 교회 목사에서 괴팅엔 대학 교수가 된다”고 했다.
그는 “로마서 강해는 총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두 권은 완전히 다른 책”이라며 “제1판을 쓴 이후 자신이 잘못 썼다는 것을 깨닫고 3년 뒤 출간하게 된 책이 ‘로마서 강해 제2판’이다. 제2판으로 칼 바르트는 독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칼 바르트는 1930년부터 1935년까지 ‘본 대학’에 교수로 봉직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독일의 히틀러와 투쟁하던 시기였다. 1933년 칼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며 “어둠이 몰려오는 시기, 신학자들은 어떻게 신학적으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긴 잡지를 출간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바르멘 신학선언’이라는 유명한 신학선언을 작성하지만 동시에 본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 당하게 된다”며 “아마도 칼 바르트가 독일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루터교 목사, 신학자, 반 나치운동가)와 마찬가지로 독일 땅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1935년부터 1965년까지 칼 바르트 교수는 자신의 고향인 스위스 바젤 대학 교수로 봉직했다. 이 시기에 교회교의학 13권이 다 쓰여진다”며 “수많은 신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 적혀 있다”고 했다.
이어 “1962년 칼 바르트는 바젤 대학을 은퇴하고, 196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며 “스위스 바젤에 있는 칼 바르트 교수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2층 서재에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 독일 화가)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는 언제나 그 그림을 명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은총의 신학’이라고 말한다”며 “칼 바르트 교수의 글에는 복음의 웅장함과 장엄함이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신학이 나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면서 마음이 기뻐 웃는 모습이 칼 바르트의 신학”이라고 했다.
아울러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은’을 보면 칼 바르트의 신학이 잘 요약되어 있다”며 “칼 바르트의 신학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설명하는 신학이다. 칼 바르트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를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