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는 성경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요? 안 믿는 자까지 포함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 어떤 식으로 화평을 이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직장인으로 최근 술을 끊으려 노력하다 보니 회식 때 무알콜 맥주나 음료수를 마십니다. 전에 술을 마셨을 때는 술기운인지 허심탄회하게 속마음도 얘기하면서 동질감이 느껴지고 회식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점점 신자가 술 마시는 것이 죄처럼 여겨지고 회사 동료들의 잘못된 모습들도 보여서 대화는 물론 마음속 얘기도 하고 싶지 않고 빨리 회식이 끝나기만 기다립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른 신자나 목사님은 술자리 자체를 멀리하여서 세상 사람들 속에서 멀어지는 것이 옳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자꾸 회사에서 외톨이가 되는 느낌, 그리고 왠지 화평하게 지내지 못해서 주님 계명을 어기는 것 같은 또 다른 죄의식이 생깁니다. 술을 마시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료 의식을 쌓고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술자리를 멀리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술은 먹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회식에 참석해 화평하려고 노력해야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확실한 답을 얻고 싶습니다.
[답변]
화평하게 한다는 뜻은?
모든 신앙적 이슈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답을 얻어야 하는데 주님은 화평에 관해 산상수훈의 서론 격인 팔복 강화에서 가르쳤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고 선언했습니다. 원어가 분란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만드는 자를 뜻하므로 영어로 ‘peacemaker’라고, 우리말도 ‘화평하게 하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기존에 발생 된 분쟁을 중재해서 서로 화해시키는 자를 뜻합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과는 차원이 조금 다릅니다.
주님의 뜻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자신부터 진심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전까지 죄로 오염되어서 세상으로만 향하던 부패한 자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새롭게 되어서 자신과도 화해가 이뤄집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비록 그 구체적인 실천은 더딜지라도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자기 인생을 꾸려가겠다고 결심 헌신하게 됩니다. 나아가 아직도 이전의 자기처럼 사탄의 노예가 되어있는 불신 이웃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 신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가 됩니다.
요컨대 자기를 비롯해 모든 이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것이 예수를 믿은 신자의 모든 대인관계의 원리와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해선 안 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한 것입니다.(마5:43-48) 주님의 사랑에 대한 권면은 심지어“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결론짓습니다.(48절)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어떤 신자도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도덕적 목표입니다. 주님이 신자에게 최고 수준의 목표를 제시해주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 보면 상당한 수준의 사랑은 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에 빠져 당신과 원수가 된 우리를 감정적으로 아주 기뻐하면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보다는 마냥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며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로선 원수는 아무리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노력해도 감정적 이성적으로 도무지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이 필요한 너무나 불쌍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생기면 복음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만약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변화되면 서로 간에 인간적인 사랑도 생깁니다. 그러나 끝까지 신자 쪽의 화평하게 하려는 노력을 거부 반발하면 인간관계는 친밀하게 변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기독교의 윤리는 인간사회의 윤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상호 모순되지는 않으나 더 넘어서는 것입니다. 범사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분별 판단 시행하는 것입니다. 십계명부터 하나님부터 온전히 믿고 따라야만 인간관계도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규범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향기를 잘 드러낼 것인지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일이고 그러고 싶습니다. 신자는 더 나아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그들의 시선이, 최소한 관심이라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는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직장인은 근무하는 회사의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명이라도 더 복음을 알게 하려고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9:19-22) 신자들이 그래야 한다는 원리는 잘 알아도 현실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목시켜야 하는지 분별하기 힘듭니다.
막상 세상은 질문자께서 느끼신 대로 예수님을 싫어하거나 그리 환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참 빛이 비춰줘도 흑암을 더 좋아하기에 외면 배척 적대합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모든 이와 무조건 사이좋게 지내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거나 그에 기준해서 살고 있으면 이웃과의 사이가,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멀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신자 쪽에서 그럴 의도는 전혀 없고 그들을 향한 감정이 상한 것도 없지만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응대를 받을 수 있음을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신자답게 살 때는 세상의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 길도 좁고 협착하며 따르는 이도 적고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불편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님은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자로선 모든 이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하나,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화평과 멀어질 수도 있으며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복음과 현실의 접목?
이런 맥락에서 질문하신 문제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질문자께서 직장동료들을 당연히 사랑하고 있고 또 복음을 전하고 싶은 근본 소명 의식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는 이미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현실에서, 특별히 술자리 회식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만 문제입니다. 조금 접근을 달리 해보겠는데 질문 자체에 내포된 몇 가지 신앙적 모순을 왜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면 자연히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술을 절제하지 못해서 파생하는 부작용과 폐해들이 죄가 됩니다. 특별히 신자에겐 하나님과의 관계(십계명의 첫 네 계명)부터 틀어지게 만든다는 차원에서 죄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역으로 따지면 술을 완벽하게 절제해 나쁜 부작용과 폐해가 생기지 않고 정말로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사실상 거의 힘들지만) 죄가 아닙니다. 나아가 정말로 사람들과 관계가 더 의로워지는 모습으로 바뀌고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오히려 권장할 수도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이차 삼차까지 가서 끝장을 봐야 하는 한국의 음주 문화는 이런 원칙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질문자도 술 마시는 동안의 동료의 잘못도 보이고 점점 술자리가 싫어진다고 실토했습니다. 술자리가 건전했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맨정신이 되었을 때 전혀 부끄러운 점이 없는 반면에 오히려 아주 의로웠다고 여겨졌던 기쁨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회식에서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는다고 하지만 진정한 고충 처리와 인생 상담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회사와 상사를 비난하고 동료들을 음해하고 심지어 함께 부정 불법을 도모하는 일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쁜 방식이 아니라 해도 술이 과해지면 자칫 부끄러운 짓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생성되는 동료 의식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서로 양보 희생하는 의로운 동지애나, 인생길의 진정한 반려자로서의 사랑이 아닐 확률이 훨씬 높고 잘 봐주어야 고달픈 월급쟁이들끼리 서로 위로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만약 진정한 동료 의식이 생겼다면 건강을 위해 금주하려고 노력하는 동료를 따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솔직히 따지면 회식을 끝까지 함께 한 자들의 동료 의식은 나쁜 짓을 함께 했다는 공범자 인식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불참하거나 중도에 먼저 간 자들을 따돌리려는 이유는 두 가지뿐입니다. 첫째는 말씀드린 대로 자기들의 불순한 모의나 세속적인 관습에 함께 해주지 않아서 미워하는 것이고, 둘째는 혼자서 고고한 척하는 것이 꼴 보기 싫거나 금주를 실행하며 의롭게 사는 것이 부러워 시기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동료들의 따돌림은 그 자체로 자기들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입니다. 부당한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하는 쪽이 나쁘며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전적인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는 한에는, 심지어 중도에 먼저 양해를 구하고 나온다 해도, 그런 따돌림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지금 회식이 싫어지는 것은 신자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나아가 아주 바람직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직장동료와 교제 단합하는데 술이라는 도구가 필수적이라는, 최소한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기에 불합리한 질문입니다. 술 외에도 진정으로 인간관계를 화평하게 하는 수단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회식에 참여하느냐 여부보다 평소에 직장동료와 진정으로 친밀하고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제 주위에 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맡았음에도 회식에 빠지지 않는 분이 두 명 있습니다. 술 대신 음료수만 마시는데도 시종일관 좌중을 리드하고 적절히 선을 지켜가며 아주 재미있게 어울립니다. 회사 동료들이 술 안 먹고도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처음 봤고 크리스천은 당신처럼 해야 한다면서 더 좋아하고 회식에 꼭 초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 되겠지만 특별한 은사와 재능 없이는 아무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현실적 선택 방안은 질문에 열거하신 것들 뿐인데 어느 쪽을 택해도 장단점이 있고 무성한 뒷말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만약 회식에 참여한다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현실적 장단점을 분별 비교하여서 자기만의 방식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고 귀찮으면 아예 회식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평소에 개인적으로 동료 사원들과 친해져서 서로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사이가 되면 됩니다. 무엇보다도 회사업무에 절대로 빈틈이 전혀 없고 오히려 업적이 더 뛰어나야 합니다. 일상적인 언행이 정직하고 진실해야 할 것은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일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먼저 질문자를 찾아와 업무는 물론 인생 상담을 요청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단지 술자리를 피한다는 이유만으로 절대로 막 대하거나 따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전에 술을 완전히 끊었다고 선포하고 아무래도 회식에 어울리면 술을 끊은 결심이 흩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질문자 스스로 술자리가 싫어지는 이유를 신앙적으로 잘 판단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회사 사정을 잘 아시기에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스스로 판단이 가능할 것입니다.
2023/1/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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