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의 치명적인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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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호 목사

많은 신자들이 “제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는 주일예배 때에 대표기도 하는 경우를 빼고는 아주 잘못된 표현이다. 대표기도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자들이 해야 할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다. 회중이 자기들이 지은 죄들을 회개해야 하지만 대표기도 하는 자로선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모른다. 우리말로는 회중이 지은 모든 죄를 망라하는 의미로 “우리의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한 개인의 경우 과연 본인도 모르게 지은 죄가 있는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의식의 존재다. 자기가 하는 일을 본인이 모를 리 없다. 머리가 먼저 판단 결정해야 행동이 따라 나온다.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데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일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인간 행동이란 숨 쉬고 걷는 것 같은 완전히 몸에 베인 일상적인 행위에 국한된다.

정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짓는 죄는 아주 드물다. 예컨대 운전하다가 어느 샌가 제한속도를 넘기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운전 중에도 순간순간 계기판을 보니까 금방 과속한 것을 알고 속도를 줄이게 된다. 딴 데 정신이 온통 쏠려 경찰이 사이렌 소리 내며 따라올 때까지 모르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경찰 사이렌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 잘못을 깨닫고 순순히 벌금을 물게 된다.

무료하게 가만히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악한 생각도 한다. 이 또한 금방 내가 왜 이런 사악한 생각을 하지, 정신을 어디다 팔지 하면서 그 생각들을 지우고 다시 정신 차린다. 감정에 치우쳐 자기도 모르게 나쁜 말도 할 수 있지만 입 밖에 튀어나온 후로는 잘못임을 깨닫는다. 그마저 모른다면 정말 양심에 화인 맞은 자다. 간혹 방탕한 세상쾌락을 죄인 줄 모르고 즐기다가 더 심해질 수 있다. 쾌락이 갖는 특유의 중독성과 마비성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려는 주제는 “신자가 된 후에 그것도 기도할 때에 관련된 것”이다. 이미 신자가 되었기에 중독성과 마비성을 갖는 방탕한 세속적 죄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예전의 나쁜 습관에 때로 넘어질 수는 있다. 단번에 옛날 습성을 무 자르듯이 끊는 자는 드물다. 그러나 옛 습성에 넘어지는 순간 이미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도할 때는 이미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구체적으로 다 알고 난 이후다. 과속도, 악한 생각과 말도, 옛 습성에 넘어진 것도 모를 리가 없다. 그럼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으며 그것이 왜 죄인 줄 성경적으로 정확히 깨달아 그대로 다 주님 앞에 이실직고하며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럼 미쁘신 하나님이 우리의 자백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 죄를 사하여서 다시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성경이 말하는 알게 모르게 지은 죄는 지금껏 우리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게 이해해왔던 내용과 차원이 다르다. 먼저 “부지중에 지은 죄”는 예컨대 길을 가다 사람이 쓰려져 있어서 도와주려고 만졌는데 이미 죽은 시체인 그런 경우다. 시체인줄 모르고 만졌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모르게 지은 죄”라고 말하는 죄들은 살펴본 대로 죄를 지을 때부터 죄인 줄 아는 것들이다. 지금 기도하는 순간에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죄”일 뿐이다. 사실은 구체적으로 기억하면서도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죄이다. 기도할 때에 일일이 자백하기 싫어서 또 그러려니 귀찮아서 모르고 지은 죄처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거기다 ‘알게’라는 수식어를 교묘히 하나 더 붙여 “하나님 죄 인줄 알고도 죄를 지어 정말 미안합니다.” 정도로 종교적 생색만 내고 치운다.

오늘날에는 구약율법 같이 구체적이고 복잡한 규정이 없기에 정말로 모르게 지은 죄란 사실상 없다. 사회법으로도 정말 몰랐다면 재판 과정에서 정상참작을 해준다. 종교적 규정을 몰라서 어기는 것은 몰라도 윤리적인 잘못은 범하고도 모를 리는 없다. 나중에 기도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고의로’ 지은 죄는 정말로 능동적 적극적으로 지은 죄이다. 사전에 미리 간교한 계략을 궁리한 후에 죄를 짓는 경우다.(출21:14) 또 ‘손을 높이 든다.’는 원어의 의미대로 공개적으로 의지적으로 남들 앞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다.(민15:30) 만약 신자가 이런 죄를 짓는다면 사실상 신자라고 할 수도 없다. 만에 하나 양보하더라도 그 죄를 회개해야 하는 기도에서조차 ‘알게 모르게 지은 죄’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는 절대 없다.

신자가 된 가장 첫째가는 증거는 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전보다 선해지기 이전에 죄를 지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죄책감이 수반되는 행동 말 생각의 범위도 아주 넓어진다. 성령이 내주하여 영을 새롭게 해줄 뿐 아니라 죄에 대한 분명한 깨우침을 주고 또 대신 탄식하고 기도해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나 여건과 사람까지 막아주시기도 한다. 쉽게 말해 죄를 짓기 전이나 짓는 중에나 지은 후에 죄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라는 표현은 기도할 때만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대신에 뼈를 깎으며 철두철미 뉘우치는 애통함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한다. 죄를 짓게 된 경위 과정 결과 의미 자신의 잘못된 생각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하나 빠짐없이 정확하게 분명한 문장으로 자기 입술로 토설해내야 한다.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골수가 마르고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절감하기에 온전하게 자백하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긍휼만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아래 시편에서 다윗이 오로지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았듯이 말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9-12, 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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